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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몸처럼 사랑하라

2010.07.15 23:32

물님 조회 수:6546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랑이란 말처럼 흔하고 그러면서도 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방황과 갈등도 알고 보면 사랑 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벌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슴형의 경우에 이 문제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사랑의 문제를 풀어내는 비결은 밖에서 찾지 말고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 대화를 통하여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만 한다는 목마른 사랑에서 자신 안에 우물을 만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설파하셨다. 또한 사랑에 대한 교훈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마태12:36-37)는 말씀을 주셨다. ‘네 몸처럼’ 이라는 말은 사랑이 참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존중(Self -appreciation)의 감각이 살아나야 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로부터 사랑 받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이 사실이 성서가 말씀하는 믿음의 내용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자신을 증오하기 시작할 때 자기 파괴가 일어나고 그 끝은 자살이 되기 마련이다.



한국 땅의 비극은 자기 증오의 에너지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세계 1등의 자살률이다. 이 사실은 돈에 미치고 1등 주의에 미쳐버린 사회에 내리는 재앙이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능력을 잃어버린 교회에 대한 심판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해야할 크리스챤들이 천만이 넘는 나라에서 매일 마다 35명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보도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은 이 땅의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감각이 죽어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비관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때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복음의 내용과 능력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러나 자신을 미워하는 자. 자신을 파괴하는 자는 이웃도 하나님도 모두 증오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은 이웃이 푼돈을 주는 구제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참 자아’인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 이웃 속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임을 직시하라는 의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내 안의 나와 나 밖의 나가 하나임을 자각할 때 그 답이 나오게 될 것이다. 관계의 깊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비례한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가치와 존엄성을 자각하는 만큼 그는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면 자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 역시 알게 될 것이다.


‘네 몸처럼’이라는 말은 이웃에 대한 행동의 동기를 나 자신 안에서 먼저 찾으라는 뜻이다. 내면의 경멸과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기심과 소유욕을 벗어나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이기적 동기에서 순수한 이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길을 가라는 말씀이다. 텐에니어그램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지나간 일을 가지고 자책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해 배워야할 지혜가 무엇인지를 찾으라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자책하다가 자살을 택했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진정한 사도로 거듭났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저주하고 파괴해서는 안된다.



 성전의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은 어린 새끼들이 아니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지기 위해서 오늘 내 자신을 돌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를 모르고 나를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어린 아이 단계에 있다.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내놓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사랑은 무엇인가 자기 결핍의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은 ‘나’를 내 줌으로서 상대의 존재 이유를 실현시킨다. 그 사랑은 참된 것, 가장 지고하고 참된 사랑을 통한 완전한 일체를 갈구하게 된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나를 나( I AM)답게 세워야 하고 나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미 살아 있지만 죽어있다. 죽은 자들에게는 자기 존엄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 필요하고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 까닭이 없다.

사랑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를 위해 명석한 지적을 하고 있는 “첫 번째 바울의 복음(마커스J.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한국기독교연구소 편)”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랑장(고전13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영적인 은사이지, 단순히 의지의 행동, 즉 우리가 하려고 결정한 것이 아니며, 단지 연인들을 위한 훌륭한 충고가 아니다. 흔히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감상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본문은 단순히 “사랑의 찬가”로 축소되어서는 아니 된다. 또한 그 의미 역시 단순히 친절하고 민감하며 사려 깊고 신실한 태도로 축소되어서도 아니 된다. 비록 그런 성질들은 훌륭한 것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본문이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의 행동으로 축소되어서도 아니 된다.



오히려 바울에게는 이 본문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한 단어로 줄여서 말한 것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생활, “성령안”에서의 생활, 성령이식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삶에 대한 줄임말이다. 성령 충만한 생활의 가장 중요한 열매인 사랑은 개인들과의 관계 이상을 말한다. 바울에게는 사랑이(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기에) 사회적 의미도 갖고 있었다. 바울에게 사랑의 사회적 형태는 분배적 정의와 비폭력, 빵과 평화였다. “그리스도 안의” 생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생활에 대한 바울의 비전은 “제국의 생활방식과 더불어 그 억압과 폭력을 받아드리지만, 너희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은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와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처형된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해된 이유는 그들이 이해한 사랑이, 개인들을 향해 마음 아파하는 연민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뜻했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랑은 당시 세상을 다스리던 지배체제에 맞서는 것이었으며, 이 세상의 지혜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하는 일에서 성령과 협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간다. 즉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할 수 있으며, 정의없는 사랑은 진부한 것일 수 있다. 사랑은 정의의 심장이며,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형태이다.”


우리는 자살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세상의 구조와 생활방식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치열한 영적 전쟁을 선포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배워가고 있고 존재와 진실(Reality)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다. 그것은 한 번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씩 가는 길이다. 그 상승의 과정은 지속적인 노력과 관심의 길이며 내적인 동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길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다. 살아있는 자는 존귀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그 분 안에서 자신의 무한한 존엄성을 감사하고 모든 필요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