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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경험에 있다.

2012.04.04 08:50

물님 조회 수:9357

 

삶은 경험에 있다.

최근에 60년 만에 돌아오는 생일인 이른바 ‘회갑’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6자를 떼고 첫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새 돌’ 맞이 축하 행사가 불재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온갖 애환의 세월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다가 마지막에 남는 말씀이 있었다.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 ( 누가 21:19)

 

나의 개인사나 온갖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지구의 자연환경 조건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곡식들이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성장하다가 마침내 씨앗이 될 수 있는 알곡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듯이 몸을 입고 지구에 와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 역시, 결국 나의 살 속에서 나의 영혼이 깨어 나오는 과정이었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감사한 것은 내 선택의 중심에 ‘영혼의 가치’를 우선시해 왔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도 그에 따르는 포기가 있기 마련이다. 진정한 선택은 진정한 포기이다. 진정한 포기가 뒤따르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은 후회와 원망이 남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만난 성서가 나에게 준 지혜가 있다면 영혼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중요한 핵심은 ‘경험’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기라도 낳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경험이 없다면 영혼의 자각도 없다. 몸을 입혀 지구에 보내 주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험의 바다 속에 나를 던져야만 한다. 여행을 하고, 공부를 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물건을 하나 사는 것 모두 경험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닌가. 사람들이 꽃을 선물하고 그 꽃에 감동하는 것은 꽃 역시 경험을 주는 선물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티브이 화면 속의 세계를 만나면서 감동하는 것이지 불꺼진 티브이를 보면서는 장시간 바라보거나 감탄할 수 없다. 사람들이 돈을 쓰는 것 역시 새롭고 신선한 자극의 경험을 주는 것에 지불한다. 전화를 하는 데 불편함이 없건만 왜 스마트폰을 사는가? 그것은 스마트 폰의 기능이 다채롭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텃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방식의 경험을 스티브 잡스가 주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기술적 진보에 의하여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직접적인 경험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사과에 대한 끝없는 정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사과를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은 의식이 성장 할수록 선택의 기준이 달라지게 되는 데 그 핵심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 ‘돈이 얼마 생기는가?’에서 ‘나에게 어떤 경험이 생기는 일인가?’ 로 의식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는 데 있다.  이런 사실은 주일이나 휴일에 문을 닫는 가계가 세월이 갈 수록 늘어가는 것을 보아도 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다가 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것이 크던 적던 경험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고정관념과 그에 따른 두려움에 매몰되어 주저앉은 일들을 못내 후회하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고 경험이라는 것을 임종 때 가서야 알게 된다면 너무 늦지 않은가? '지나간 잘못을 후회하지 말고 하려고 했다가 하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하라'고 탈무드는 말하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핵심은 선택을 선택답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받아 들여야 할 때 받아들이고 거부할 때 거부하고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안 되는 걸까?

 

심리학의 용어에 ‘과대 지각편향’ 이라는 말이 있다.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과도하게 염려하는 증상이다. 결혼을 앞두고 실연하게 되지 않을까. 시험을 앞두고 낙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불안 심리에서 발생하는 착각일 뿐 꼭 사실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찾아온 일들을 새로운 사랑과 성공의 기회가 나에게 찾아오고 있구나 하는 기대와 설렘으로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근시안적인 사고로 두려움의 착각 속에 빠져 삶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사장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쓸데없는 수많은 정보가 제대로 된 선택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앞서면 경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일단 두려움에 빠지면 이해와 경험이 정합될 때만이 일어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과거에 입력된 정보로 미래를 추측하고 재단한다는 것은 직관과 통찰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밭에 뿌리는 씨앗이 싹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 벌벌 떠는 사람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농부는 믿음으로 씨를 뿌린다. 가을의 수확을 바라보면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성서가 말씀하는 핵심은 근시안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멀리 보는 삶을 살고 어떤 재난의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데 있다. 그 믿음의 바탕위에서 신나게 폼나게 인생을 살아가라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선택권을 스스로 존중하는 데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방식으로 길들여진 사람은 직업이나 결혼조차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서워하게 된다. 선택에 무기력해지게 되면 존재의 중심을 세울 수 없다. 그는 어려움과 고난을 피해갈 뿐, 인내와 수고의 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보화들을 놓치게 된다.

 

선택의 특성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선택은 세월이 지난 뒤에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택과 포기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인생에서 얻는 것이 없다. 그들은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도 없거니와 두려움에 떨다가 자신의 영혼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