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버지의 잔칫상
2014.10.14 09:15
세상은 아버지의 잔칫상
몸을 입은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이’에 있다. 이 사이의 대표적인 것은 공간 시간 인간이다. 이것을 인간의 삼대명제라고 말한다. 나와 나 사이, 나와 너 사이, 나와 자연과의 사이,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좋으면 그것으로 인생은 완성이고 행복이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다. 선불고의 수행에는 무시선, 무처선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 의식권에 선의 핵심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분과 나 사이에는 공간이 없다. 물론 시간마저도 없다.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 대한 개념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내가 받아들여 나도 무한을 살아가는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나는 첫 시집의 머리말에 다석 선생의 "내일 죽어 어제 묻혀 오늘 산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는 말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쓴 시가 ‘전생을 묻는 이에게’라는 시이다.
우리가 어찌
초면일리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오기 전 우리는
하느님의 의자 밑에서
숨바꼭질하며 놀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다시
그 분에게로 가면
쓸데없는 근심으로 지새우던
오늘을 웃지 않겠습니까
몸뚱이를 나로만 알던
철부지 어린 시절들
화내고 욕심 부리던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 전생을 묻는 이에게 -
지구라는 공간 안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생각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의 세계에서는 과거나 미래는 없다. 예수님이 말씀한 ‘때’(카이로스)를 이해하려면 어제, 오늘, 영원이 동일한, ‘영원한 현재’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시간은 현재이다. 이것을 알 때 무엇인가 있어야만 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인류의 원죄의식 같은 결핍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인간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세상이다. 스트레스란 긴장이고 자기 억압이다. 그것은 결핍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래에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는 목마른 갈망과도 관련이 깊다. 내가 어떤 결핍의식과 목마른 갈망에 시달리고 있는지 성찰해보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일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들어서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일 수 없다. 진정한 믿음은 임마누엘의 믿음이다. 어느 곳, 어떤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믿음이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 동시에 존재하는 동시적 존재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체의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고, 과거와 미래에 포로가 되어버리면 지금 나에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놓치게 된다.
우리가 시간의 중력을 벗어나서 영생의 시점에 서 본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 세계는 죽움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우주는 살아있고 우주 안에는 죽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우주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뿐이다. 3차원 의식의 시간 안에 사는 사람들은, 변화의 한 시점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그 말은 수평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는 말이다. 모든 입자는 한 형태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백 년도 못사는 인간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든 소멸이 죽음으로 보이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에게는 생명의 작용일 뿐이다. 한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갈 뿐인데 그것을 모든 것의 끝으로 오해한다.
인간은 세 가지 꿈을 꾸면서 살아간다. 낮에 꾸는 꿈, 밤에 꾸는 꿈, 그리고 죽음이라는 꿈이다. 이 꿈은 모두 소뇌의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죽음은 생명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생명의 다른 얼굴이다. 병에 걸려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 섰던 사람들은 그 때서야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곤 한다. 즉 생명의 다른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세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품은 사람은 이미 영생의 세계에 있다고 하는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말을 알 길이 없다.
우주에는 단 하나의 입자도 죽은 것이 없다 모든 물질의 원소기호는 소수점 일곱자리의 순환소수로 되어있다. 그 입자들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고 일체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모든 입자와 세포들은 생명의 살아있는 표현이요 증거이다. 그러나 육체의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오감의 세계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오감을 초월한 차원의 시간과 공간, 영생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살아갔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미 와있는, 더 이상 죽음도 눈물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 나라와 의를 심는 노력을 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셨고 더 이상 죽음도 고통도 없는 영혼의 지복을 지상의 현장에서 누리게 하셨다.
요한 계시록은 지금 여기에 와있는 천국,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영적 실상을 상징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고치에서 깨어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이 땅의 세계가 주는 중력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믿음을 누리게 된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 1 -3)
하나님은 처음이시고 끝이시다.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주시고 아담이 에덴에서 먹지못한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신다. 하나님 안에서 그 분과 함께 있는 나 역시 시작이며 끝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지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지성소가 있는 아름다운 성전을 세워가야 한다. 그리고 이 지성소에서 샘솟는 생명의 에너지가 세상을 향하여 흘러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런 자각과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곧바로 염려와 근심과 슬픔으로 떨어지게 된다. 삶은 내 의식과 에너지가 표현되는 공간이다. 내가 지금 어떤 의식에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빛의 밝기만큼 있느냐에 따라서 내 의식과 신경계는 작동하게 되고 주변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구에서의 삶을 허락하신 동안 우리는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나가게 하고 모든 형제와 자매를 축복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가 임하도록 모든 분열과 다툼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모든 존재와 공간과 시간으로 넘치게 흘러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성은 신성이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아는 자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진리를 사는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성이 지금 나에게서 발현될 때 지금 여기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모든 삶의 순간이 지금이다. 그러므로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란 지금 어떤 현재에 내가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을 사는 사람은 영혼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 평화는 하늘이 내려 주시는 평화이다.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 일체가 내 것임을 알게 된다. 하늘도 땅도 바람도 구름도 , 삶도 죽음도 모두 내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상속의 재산으로 자식에게 준다. 그러나 종은 상속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자식으로 사는 존재가 되어야지 시간과 공간과 돈과 세상의 평판에 매여 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나에게 순간마다 모든 공간에서, 모든 때마다 ‘지금’이라는 잔치상을 차려 주신다. 이 세상 모두가 내 인생이 아버지의 잔칫상이다. 잔칫상에는 여러 가지 맛의 반찬이 있다. 쓴 맛도 있고 달콤함도 있다. 지금은 예배라는 이름의 잔칫상을 차려 주셨다. 이 잔칫상을 온전히 기쁨으로 맛있게 받아드리느냐, 아니면 그 상을 둘러엎으면서 굶주리며 살 것이냐는 오직 내 문제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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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 이라는 아버지의 잔치상을 ....자주 자주 둘러 엎고 있습니다. 오늘 따라 찔리네요. 아버지의 잔치상을 오롯이 받는 날.......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