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하늘을 본 사람 - 바디메오
2015.11.04 05:08
그리스도의 하늘을 본 사람 - 바디메오
마가복음 10: 46- 52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맹인거지 바디메오의 치유 사건이 등장하고 있다. 나는 바디메오 사건이 마가의 원 복음에서 가장 감동적인 예수와의 만남이자, 마가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복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바디메오는 그 긴박한 순간에 찾아온 만남의 기회를 움켜잡았다. 나에게 찾아오는 인연도 있지만 내가 찾아가야만 하는 인연도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찾아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찾아오기만 바라기 때문에 삶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좋은 인연의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음을 바디메오는 교훈해 주고 있다.
어느 날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바디메오는 군중과 함께 지나가시는 이가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 다윗의 자손 예수여 , 저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디메오의 고함 소리에 제자들은 화를 내면서 그를 제지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그를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다. 아마 예수의 말씀을 듣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바디메오는 방해꾼이자 하찮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더 큰 소리로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눈을 뜰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붙잡기 위해 자기 목소리를 냈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 앞에 침묵했다면 그의 인생은 별 볼일 없이 끝났을 것이다. 자기 목소리로서의 ‘제소리’를 낸다는 것은 내 인생을 인생답게 사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예수는 맹인의 절박한 외침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거지를 부르셨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멈추시고 한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러자 사람들의 거지에 대한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어졌다. 사람들은 맹인에게 가서 “ 당신은 운이 좋소, 이리로 오시오. 그 분이 당신을 부르시고 있소” (49절) 라고 말했다. 그러자 맹인은 낡은 겉옷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다. 구걸하는 인생을 상징해 주는 낡은 겉옷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무대에서 이제 역할이 바뀌게 된 것이다. 거지 역할을 하는 데 있어 필요했던 소품과도 같았던 겉옷은 그의 진면목을 가리는 가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제 그는 거지의 자리에서 예수 앞에 서는 자리로 그의 위치가 바꾸어졌다.
맹인에게 예수는 물음을 주셨다. “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물음 앞에서 당황하거나, ‘알아서 해주세요’ ‘잘 아시면서....’ 라고 말하기 쉽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면 즉각적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맹인에게 했던 질문을 내가 받게 된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도움을 청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지 명확한 자기 이해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표현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바디메오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실 수 있는 바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선생님(랍부니),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51절)
랍부니는 일반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깊은 존경과 애정을 담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자신을 거지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하는 예수의 물음과 거지의 랍부니라는 호칭은 둘 사이에 신뢰의 소통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바디메오가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사용한 언어는 그리스어 ‘아나블렙소’는 치켜보다. 위를 보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눈만 떠서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라 위(하늘)를 향하여 시선을 두는 눈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하늘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금강이라는 서사시를 쓴 신동엽 시인은 이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나는 중증 장애인들과 생활을 할 때, 늘 누워서 지내는 그들이 사방이 막혀 있는 것과 같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위에는 열린 하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아주 커다란 문을 천장에 매달은 적이 있다. 신앙이란 내가 만나는 모든 존재와 처하는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는 일이다. 즉 모든 것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그런 눈을 믿음의 눈이라 한다.
예수는 맹인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 주셨다.
“ 좋다,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52절)
예수는 바디메오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셨다. 복음서의 치유사건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믿음은 치유의 일차 조건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바디메오는 믿음의 힘으로 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 되었다. 베세다에서 치유받은 맹인은 집으로 돌려 보냈고 거라사의 광인은 예수를 따르고자 했으나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셨지만 바디메오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바디메오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열린 눈으로 지켜보는 증인이 되었다.
마가는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열린 눈으로 지켜 본 사람이 바디메오 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생을 수난 속에서 멸시와 학대 속에서 빛을 발견한 바디메오는 예수의 수난 과정을 지켜보면서 순결한 예수의 죽음과 함께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 했을 것이다. 석가는 연꽃을 들어 염화미소로서 불법을 전했다하지만 예수는 온 몸이 찢겨지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바디메오에게 그리스도의 하늘을 눈빛으로 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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