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고 있느냐? - 숨님 메시지
2021.03.08 22:00
20210307
마태복음 26:31~46. 아직도 자고 있느냐?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장면을 보면 인류의 생사 문제를 놓고 영혼의 사투를 벌이는 예수와 그 곁에서 잠만 자고 있는 제자들이 대조되고 있다.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구르지에프(1877-1949.10.29.)가 지구별을 잠자는 세계이며 지구인들은 자동에너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말을 생각했다. 이 표현은 인류의 대부분은 눈뜨고 있는데도 자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구르지에프는 대부분의 사람은 내면적으로는 죽어 있다고 통찰했다. 이 말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하여금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하신 예수의 말씀과 상통한다.
제자들의 잠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들의 영은 잠자고 있는 상태의 영이었다. 그들은 잠자는 의식권의 인류를 상징한다. 잠자는 의식권에 있는 사람들은 성격의 지배를 받고 있다. 성격의 가면을 자기 자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 소유, 직함 등을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이 차원에서는 육체를 나로 알고 있기에 육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죽음은 소멸이고 육체의 소멸은 그들의 끝이다. 그들은 그 무엇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나’라는 ‘실존’을 자각하지 못하고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한다. 신의 형상으로서의 나를 알 길이 없다. 자신의 집착과 환상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를 실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구르지에프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행동, 말, 생각, 감정, 확신, 의견, 버릇 등은 외부로부터 받는 영향,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인상에서 기인한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단 하나의 생각, 단 하나의 행동도 나올 수 없다고 통찰한다. 인간이 새로운 생각이 열리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성서의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똑같이 나의 인생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먼저 통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느 때는 베드로, 또는 가룟 유다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그리스도 의식으로 있다. 성서를 읽으면서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를 향해 혀를 차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왜 저러나 하면서 나도 왜 저러나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남들이 하는 일을 보면 만일 내가 한다면 저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내가 12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면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을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부르실 때에 베드로처럼 배를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십자가의 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이다. 예수는 그 길이 자신을 지구에 보내신 소명의 길임을 확신하고 선택했다. 최후 만찬장에서 잔에 부어지는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사람을 위해 쏟는”(14:24)이라고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28)라고 되어 있다. 마태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용서와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는 병자를 고칠 때도 단순히 병을 고쳐 주는 데 머물지 않고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 바리새인들이 이 점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다반사였다.
인간의 질병은 마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 사람의 깊은 무의식 속에, 그 시대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강력하게 심어진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해결 될 수 없는 사슬을 예수는 끊어내고자 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선언은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예수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용서’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마태에게 있어 사랑은 용서와 하나이다. 예수는 처절한 죽음의 자리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고 자신을 못 박고 경멸하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바쳤다. 신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삶 속에서 용서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증거된다. 용서할 줄 모르는 비정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예수로부터 배움이 없는 사람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세 번의 기도를 드렸다. 첫 번째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때 예수는 근심과 번민에 싸여 있었다(38).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바로 이 정신이 믿음의 핵심이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청원의 내용이 주기도문에 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황금률이라고도 하는 산상수훈의 중심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말씀을 앞에서 나눈 적이 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핵심은 겟세마네에서 드려진 예수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의 여정을 지구에서 잠시 동안 보내고 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더 혹독한 두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믿음’으로 우리는 더 깊은 믿음의 성장을 경험한다. 성장이란 배움의 성장이고 의식의 성장이다. 의식이란 내 안에 있는 무한한 땅이다. 그 땅을 갈아엎어서 우리는 영적 사랑과 지혜의 열매를 수확해야 한다. 그 밭에는 부정적이고 습관적인 정신적, 감정적, 또는 육체적 잡초들이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 영혼의 밭에 거름을 주고 어떤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의식을 가진 인간이 이 세상에서 거둘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은 게으름과 습관의 잠에서 깨어나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내 자신과 이 땅에 실현하는 일이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기쁜 수확이 될 수 있도록 성숙해지는 일이다. 내 의식의 진동 주파수가 우주의식 곧 그리스도 의식의 진동수까지 다가설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자칫하면 잠에서 태어나 잠에서 살다가 잠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아침에 자가격리 중인 서산님이 ‘벼’시를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늘의 말씀 주제와 통하는 것 같아서 나누어 보기로 한다.
벼
내가 한 알의 씨앗으로 떨어진 이후
참 정신 없이 살아왔었지
나는 삶이란 싸움이요.
투쟁인 줄 알았어
온몸으로 부대끼는 고통의
연속인 줄 알았지
반란의 창날 같은 자존의
끝을 세우며
숨막히는 무더위와
땡볕으로 갈라지는 논바닥에서
내가 늘어진 적이 몇 번이었던가
그 혼절의 현기증 속에서
지옥이란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
지금은 시월
나는 서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며
흔들리고 있지
씨앗이 열매가 되고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는 세월 속에
나의 하늘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지
세상은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임을.
제1시집 <나의 하느님이 물에 젖고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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