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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이해와 비폭력의 길.

2021.03.16 11:29

물님 조회 수:6511

마태복음 26: 47-75 용서 이해와 비폭력의 길.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행진은 그 분의 모든 말씀을 실제로 구현하는 여정이었다. 예수의 길은 사랑이 용서와 하나되는 피어린 여정이었다. 사랑하기는 쉽지만 용서는 어려운 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하지만 용서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해 파경을 경험하지 않는가.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질량과 용서의 질량이 같을 때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이나 교회가 봉착하는 어려움은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삶의 자리에서 용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에고를 넘어서기가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포용을 할 수 없고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진정한 용서는 상대가 그렇게 행동 할 수 밖에 없었음을 깊이 이해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용서하고 말고가 없는 상태에 진입할 때의 자연스러움이 용서이다.

 

용서의 힘을 가진 이해


용서가 어려운 것은 다짐과 체념으로는 극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민의 가슴과 지혜로운 통찰의 눈으로 상대와 상황을 바라보는 데서 용서의 길이 열리게 된다. 누군가가 나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얘기할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생각해보자. 그때의 상황에서는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노라고, 뭘 그런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고 방어하고 합리화하는 변명을 하지는 않았은가. 그것은 에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흔히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신에게 중요한 진실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자각해야 한다. 이 자각을 통해서 우리는 고요해질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의 말에 고요히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에고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나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겸허하게 싱대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상처 받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고 결국 자기 자신을 깊이 치유하게 된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을 수 있다. 바로 이 진실을 이해할수록 우리는 사랑의 힘을 길러가게 된다. 상대방과 일어난 상황을 내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의 요구와 상대의 요구가 균형점을 찾게 된다. 결국 이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용서의 힘을 가진 이해이다.

 

용서 - 마음의 방어막 제거


용서는 상대와 나 사이의 철조망을 제거하는 일이다. 상대와 나를 동시에 찌르는 가시철조망의 방어선을 제거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때 우리는 평화로워질 수 있다. 내가 평화로워질수록 이웃들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 산상수훈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자식이란 하나님의 신성한 의식에 뿌리를 박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은 힘과 지혜와 사랑이다. 신성한 의식의 사람은 어떠한 결핍의식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그 누구이든 인간을 우러러 보지 않고 내려다 보지도 않는다. 만인을 위한 봉사와 특히 약자를 위한 배려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삶, 특히 십자가의 행진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범과 지침이 된다.

예수의 체포 장면은 용서의 길을 가는 사람들, 곧 신성 의식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하는 첫 번째 난관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 때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 사제의 종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52)’ 라고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은 철저하게 비폭력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는 그 말씀대로 저항도 보복도 하지 않으셨다. 폭력도 모두 일어나는 대로 인정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천사의 보호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감싸고 있는 사람은 어떤 폭력과 죽음으로도 해칠 수 없다. 26-28장은 바로 이에 대한 증언이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복수심을 내려놓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비폭력의 길을 믿음으로 갈 수 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


마태복음에만 가롯 유다의 죽음에 대해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유다에 대한 기록 앞에 베드로의 배신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26장의 대사제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 다음에 베드로의 스승에 대한 부인이 등장하고 27장에는 가롯 유다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유죄 판결 후에 자신의 한 일을 후회하면서 은전을 대 사제와 원로들에게 돌려 주려 시도 했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번복 행위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증인이 사실에 대해 번복하면 재판을 다시 해야 하지만 지도자들은 유다의 고백을 무시했다. 그것은 법을 무시한 불법 재판이었음을 증명한다.

마태복음은 가롯 유다가 뒤늦게나마 자신이 저지른 일을 번복하기 위해 노력했었고 배신의 대가로 받은 돈을 성전에 내던졌다고 긍정적 시각으로 기록했다. 예수의 배신자인 가롯유다도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진행되었다. 가롯 유다는 목을 매어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배신과 자책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망쳤다. 자책은 자신이 자신을 책망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 달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자책과 참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두 사람은 보여 주고 있다. 루미는 이런 시를 전하고 있다.

 

오라,
그대가 누구이든
신을 버린 자
이방인
불을 경배하는 자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집은 절망의 집이
아니다.
그대가 비록 백번도 넘게
회개의 약속을 깨뜨렸다
할지라도.”
M. 루미

 

베드로는 자신의 과오를 하나님의 자비에 맡곁고 유다는 자신이 무엇인가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렸다. 유다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자신의 과오를 맡기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심판해버렸다. 마태는 우리가 살다 보면 저지를 수 있는 큰 과오가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라고 권고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예수처럼 순수한 영혼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일은 시대마다 반복되어 왔다. 특히 광화문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매한 영혼들에게 저지르는 종교적 신념의 세뇌와 폭력은 갈수록 공고해 지고 있다. 마태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왜곡된 신념에 의한 집단적 폭력에 의하여 어떻게 십자가 사건이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나에게 저지르는 폭력인 분노와 복수심, 자칫하면 휩쓸리기 쉬운 집단주의의 함정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종교적 도그마의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지에 대해 쓴 시 한 수를 나누어 본다.

 

  내 유년의 가르침은

                숨 이병창

 

하와를 유혹한 뱀 때문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우리는 형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뱀을 잡아 죽이자고

이 세상을 서럽게 만든 원수

뱀들을 잡아 죽이자고

우리는 논두렁과 야산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전쟁 포로를 잡듯이

제법 큰 뱀 한 마리를 잡아

전신주 옆에 매달아 화형식을 거행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러나 말 못하는 뱀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뱀은 무어라고 항변하며

죽어 갔을까.

뱀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원망과 탓의 비빔밥을 먹어대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뱀을 향한 돌팔매질부터 배운

어린 날의 예배당

내 유년의 가르침은 그래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