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 다시 살아나다. - 2016. 9. 18일 주일
2016.09.21 06:29
+나사로 다시 살아나다. - 2016. 9. 18일 주일
요한복음 11: 17 - 44
예루살렘에서 일시 피신하신 예수께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 예루살렘에서 2km 밖에 안 되는 베다니로 이틀 길을 걸어서 오셨다. 요단강에서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계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사로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되었다. 열대지방의 장례 풍습은 운명을 하면 곧바로 무덤에 안치하거나 화장을 하곤 한다. 나사로는 죽은 밤에 그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을 와서 곡을 하고 가족들을 위로 했다.
유대인들은 운명을 하면 그의 영혼은 자신의 육신이 분해되고 얼굴빛이 사라지는 것을 삼일 동안 지켜본 뒤에 떠난다고 믿었다. 본문의 나흘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나사로가 육신적으로 완벽하게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일행이 베다니 가까이 오셨다는 기별을 듣고 먼저 마중을 나간 것은 언니인 마르다였다. 이 때 마리아는 비탄에 잠겨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두 여인의 성격이 대조 되고 있다. 이 두 자매에 대한 기록은 루가복음 10장 38-42절에서 볼 수 있다. 마르다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인이다. 집안 일로 바쁘고 누군가를 도와주느라 쉴 틈이 없는 데카그램 2번 유형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께서 마을 가까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울음을 그치고 즉각적으로 일어나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자 마자 “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만일 .... 했더라면
인간은 큰 고통을 만나게 될 때 ‘만일 .... 했더라면’ 이라는 말로 자신을 책망하거나 자책을 하곤 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속에 나타난 마르다의 말은 자책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원망과 화가 깃들어 있다. 아마 마르다는 예수께서 자신들의 급박한 상황에 대한 기별을 받으시면 곧바로 오실 줄 믿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틀이나 유예한 것에 대한 풀길 없는 분노와 원망부터 쏟아내고 있다. (2번 유형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가장 공격적인 8번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일단 자신의 분노감정을 표출한 다음 마르다는 실낱같은 자신의 희망과 기대를 말한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22)
마르다 앞에서 침묵하시던 예수는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지금 나사로를 살려 주겠다는 말씀인지, 아니면 종말의 날에 부활한다는 유대인들의 관습적 믿음으로 위로하는 말인지 모호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마르다는 후자로 알아 들었다. 그러기에 “예,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이 말의 밑에서 그녀의 희망과 소원의 한 자락이 애절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말 속에는 미래의 부활이 있다면 왜 지금은 안되는가?라는 절규가 깃들어 있다.
유대인들의 부활에 관한 전통은 구약성서 거의 말미에 있는 다니엘서 12: 2절에 나타난다.
“ 그 때는 땅 속에서 잠자던 자들이 깨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도 있고 영원한 수치와 멸시를 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슬기를 간직한 이들과 많은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이끈 자들은 하늘의 별들처럼 언제까지나 빛나리라”
예수시대의 정황을 보면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다 (마가 12:18. 행전 23:6-9)
삶을 속이는 것 중의 하나는 ‘만약’이라는 말로 과거를 자책하거나 습관적이고 익숙한 ‘위로의 말’로 현재로부터 도피하는 일이다. 수많은 종교적 수사 속에서 지금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묻히고 있다. 그러기에 익숙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미래의 천국과 부활을 희망사항으로 말하면서 지금 누려야할 천국과 부활을 포기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때에 임할 수 있다. 예수는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말씀한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를 생명의 빛이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생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살아있게 하는 작용이다. 그 작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은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야만 한다. 육체든 정신이든 영혼이든 먹지 않고 힘을 쓸 수는 없다. 빵 역시 먹어서 힘을 얻게 하는 음식이다. 먹고 소화하고 힘을 얻어 일하게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지금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부활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종말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종말일 수 있지 않은가? 전자가 관념이라면 후자는 생생한 삶이다.
신앙이 습관이 되면 하나님의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완고하게 믿게 된다. 그것이 마르다식 믿음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 후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25-26)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는 물음 앞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
“ 예, 주님 저는 주님이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27절)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도약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르다는 예수의 물음 앞에서 믿음의 도약이 일어났다. 상식적인 믿음에서 깨어난 진정한 영생의 믿음으로 들어섰다. 마르다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과 동일하다. 마르다는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은 교회를 다니는 것, 또는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과연 그런 것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 기자는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 분에게로 집중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나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는 자이니 누구든 나를 믿는 사람은 죽는다 하여도 다시 살 것이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 11:25-26)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핵심이 그리스도요, 그 분의 말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날수록 친목단체로 변하게 되고 현재 누려야할 생명력을 잃게 되면서 내세 지향적 신앙이 된다. 신앙의 초점은 가장 먼저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 있다. 이점을 놓치게 되면 자신을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거나 기독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영생의 관점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소적 개념으로서의 ‘이곳’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여기’를 살게 된다. 이것이 지구의식, 육체의식으로 부터의 거듭남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오직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 때 우리는 생과 사를 초월한 삶의 공간에 있게 된다.
마리아와 함께 우시는 예수
마르다가 예수를 만나는 동안 마리아는 집에서 문상객들과 함께 슬픔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마르다는 동생에게 조용히 예수의 부름을 알렸다. 마리아가 밖으로 나가자 문상객들은 마리아가 무덤에 가는 줄 알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예수를 만난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런데 그 후에 이어지는 말은 마르다와 다를 바가 없다.
“ 주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몸을 던져 슬퍼하는 마리아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마르다와의 만남과는 달리 말씀을 하지 않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다. 오직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 함께 하는 것이 큰 사랑이다. 매우 침통해 하셨다는 표현(엔브리모)은 말이 콧김을 내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크게 화가 나거나 나무랄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슬픔의 표현이다. 예수는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초월적인 삶을 사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사랑 한 가운데서 온전히 함께 울고 웃던 분이었다. 예수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예수께서 얼마나 나사로를 그토록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 놀라워했다.
예수는 침통한 마음으로 무덤에 오신 다음 돌을 치우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마르다는 썩은 시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그녀는 미래의 부활, 곧 과거에 입력된 자신의 생각에 대한 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마르다는 아직 돌을 치우지 못한 믿음의 영역에 있었다. 예수는 마르다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같은 공간 안에서 마르다와 사람들은 나사로의 썩어가는 시신을 바라보고 있고 예수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나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나사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상식적 믿음과 부활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과거 시점에서 현재를 보는 것과 미래 시점에서 현재를 보는 차이이기도 하다.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은 알고 있으면서 왜 미래의 기억은 알지 못하는가?’를 묻고 있다. 스티븐 호킹은 과학적 법칙의 세계에서 미래와 과거의 기억은 함께 있음을 통찰하고 있다. 영성이란 바로 믿음의 실상으로서의 미래의 기억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가슴 떨리는 감격이다. 의식은 육체 의식에 갇혀 있으면서, 영성 수련을 한답시고 어느 기법에 매이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허무한 짓인가를 나는 많은 수업료를 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미래의 기억을 깨어나게 하는 믿음으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큰 은혜이다.
미래의 기억과 연관해서 하영(산성)이와 나눈 카톡의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물님! 이반 일리치는
계획- 실행 - 피드백
의 계획 단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개발을 위한 사고 구조라고 하는 말이 떠올랐어요. 지금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데 이제는 저 패턴에서 벗어나
구하고 - 즐기고- 감사
혹은
호기심 - 탐험 – 깨달음
이런 방식으로 다이어리를 써야 겠습니다”
“다석 유영모님은 될 일을 하지 말고 된 일을 하라고 하셨지
너의 통찰이 이 아침에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사람들이 삶을 피폐하게 사는 이유는 이미 된 세상의 법칙을 모르고 억지로 자신을 들들 볶으면서 자기 학대와 무한 경쟁으로 살기 때문이겠지.
나사로는 무덤에 있지만 미래의 기억을 아시는 예수의 눈에는 무덤을 열고 나오는 나사로를 바라보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게지
자연은 저절로의 세상
거저의 세상을 잘 보여주고 있지
간밤에 내린 비에 숲의 모든 식물들이 생기를 얻는 것처럼
이미 된 일을 감사하고 축복으로 누리는 너로 인해 메마른 인생들이 촉촉함을 누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나사로야, 여기 밖으로
예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먼저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죽은 자를 깨우는 세 마디 말씀을 외치셨다. 그리스 말에는 동사가 없다.‘ 나사로야, 여기 밖으로’. 그 순간 모든 슬픔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쁨으로 바뀌어졌다
세마포로 둘러 싸여져 묶여진 채 나사로는 무덤 밖으로 나왔다. 예수는 그를 향하여 ‘풀어서 가게 하라’ 말씀하셨다. 풀어라 (아페테.)는 말은 용서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자는 용서하고 풀어야 한다. 용서 없이 영혼이 자유로울 수 없다. 주기도문에 있는 바처럼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때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풀어지게 한다. 내가 나를 풀고 너를 풀어 줄 때 하나님이 나를 풀어주신다.
예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이 다른 점의 하나는 예수의 빈 무덤에서는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가 가지런하게 개어져 있었지만 나사로는 자신의 수의를 벗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로의 수의를 벗겨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는 사명이 나에게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코도 풀어야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막힌 사람, 막힌 세상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무덤의 돌문을 치우고 나사로의 묶인 몸을 풀어 준 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부터 ‘ ... 야, 여기 밖으로’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절망과 어둠의 무덤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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