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박노해
2020.06.30 23:42
박노해
아침이면 목 마른 꽃들에게 물을 준다
저녁이면 속 타는 나무에게 물을 준다
너희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구나
서로를 경계하지도 멀어지지도 않았구나
벌들은 꽃과 꽃을 입맞춰주고
바람은 서로 몸을 기울여 손잡아주고
무더위에도 속 깊은 만남으로
살고 살게 하고 살아가는구나
복숭아는 대지의 단물을 빨아올리고
체리 자두 블루베리는 달콤하게 익어가고
벼 포기는 자라고 감자알은 굵어지고
사과알은 당차게 가을을 향해 걷는구나
코로나 뒤의 검은 그림자를 뚫어보며
먼 곳을 바라보는 내게 나무가 그랬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쉽게 달관하거나 위로받지 말라고
좋은 날도 나쁜 날도 그냥 가지 않는다고
날들은 알게 모르게 무언가를
내게 안겨주고 내게 남겨주고
내 안을 꿰뚫고 지나간다고
무력한 인간의 날들이여
불가촉 세계의 날들이여
너는 나의 무언가를 헤쳐놓고 가는구나
너는 내게 무언가를 심어놓고 가는구나
나는 하루하루 날을 받아 사는 생
어떤 날도 피할 수 없기에
어떤 날도 내 안에 모신다
나 또한 무언가를 심어나간다
하루하루가 내게는 결정적인 날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는 귀인이시니
푸르른 걸음으로 너를 향해 가야겠다
무더위 속에서도 강인한 저 나무들처럼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날들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3 | 수운 최제우(崔濟愚)의 시 | 물님 | 2020.08.04 | 3682 |
32 | 운명 - 도종환 | 물님 | 2017.05.21 | 3681 |
31 | 나무에 깃들여 | 물님 | 2016.09.29 | 3681 |
30 | 조문(弔問) | 물님 | 2016.11.24 | 3679 |
29 | 뱃속이 환한 사람 | 물님 | 2019.01.23 | 3672 |
28 |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정희성 시인 | 물님 | 2020.11.06 | 3671 |
27 | 사랑 -괴테 | 물님 | 2019.05.11 | 3671 |
26 | 내 인생의 책 | 물님 | 2020.08.05 | 3665 |
25 |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 | 물님 | 2019.12.18 | 3664 |
24 | 까미유 끌로델의 詩 | 구인회 | 2020.05.10 | 36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