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타전하다
2012.04.24 01:06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13 | 그 꽃 [1] | 물님 | 2009.11.22 | 2266 |
312 | 아침에 쓰는 일기.3 [2] | 하늘꽃 | 2008.05.20 | 2265 |
311 | 세가지의 영혼, 세가지의 기도 [2] | 물님 | 2009.07.02 | 2263 |
310 | 짧은 전화 긴 여운 - 오리지날 버전으로 [3] | 도도 | 2009.09.28 | 2257 |
309 | 박성우, 「소금창고 | 물님 | 2011.10.24 | 2251 |
308 | 좋아하는 노래 : '청보리밭의 비밀' [2] | 수행 | 2011.03.22 | 2249 |
307 | 담쟁이 | 물님 | 2014.05.13 | 2237 |
306 | 나는 천개의 바람 [2] | 물님 | 2010.01.24 | 2234 |
305 | RUMI Poem 2 [2] | sahaja | 2008.04.21 | 2220 |
304 | 사랑하는 별하나 [1] | 불새 | 2009.09.24 | 2219 |
이미 과거 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통증이 견갑골을 들어 제치고 올라와 가슴을 일렁일 때, 그건 이미 과거 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그제야 거짓말 같은 시를 타전하기 시작하는.
이 아침 이 글이 가슴을 휘몰아갑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