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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

2008.08.03 07:32

이상호 조회 수:6359

확신


박경리



씁쓸한 삶의 본질과는 상관치 않고

배고픈 생명들 팔자소관 내 알바 아니라

연민 따위는 값싼 감상이거니

애달픈 여정이란 못난 놈의 넋두리

상처의 아픔 같은 것 느껴 보기나 했는가



그런데도

시인들이 너무 많다

머리띠 두른 운동가도 너무 많다

거룩하게 설교하는 성직자도 너무 많다

편리를 추구하는 발명가도 많고



많은 것을 예로 들자면

끝도 한도 없는 시절이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

확고부동하게 옳다고 우기는 사람 참으로 많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늘어나게 되고

사람은

차츰 보잘것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뭇 생명들이

부지기수

몰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땅도 죽이고 물도 죽이고 공기도 죽이고



연약한 생물의 하나인 사람

그 순환에는 다를 것이 없겠는데

진정 옳았다면 진작부터

세상은 낙원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옳다는 확신이 죽음을 부르고 있다

일본의 남경대학살이 그러했고

나치스의 가스실이 그러했고

스탈린의 숙청이 그러했고

중동의 불꽃은 모두 다

옳다는 확신 때문에 타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땅을 갈고 물과 대지를 정화하고

불사르어 몸 데우고 밥을 지어

대지에 입맞추며

겸손하게 감사하는 儀式이야말로

옳고 그르고가 없는 본성의 세계가 아닐까



* 지난 5월 별세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쓰신 39편의 시가 유고시집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란 제목의 시집인데 시집제목으로 뽑은 시구는 <옛날의 그 집>이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팔순이 넘는 세월동안 작가가 몸으로 체득한 생의 진리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바느질하듯 한땀 한땀 시에 담았습니다.  그중 한편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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