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나들 수 없는 구렁텅이
1907년 3월 동경에서 일왕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동경권업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진기한 볼거리가 많았던 이곳
난간이 처저 있는 동물 우리에 탕건에 갓을 쓰고 있는 조선인
남성과 장옷을 입고 눈만 내놓고 앉아 있는 여인이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일본인의 꾀임에 속아 짐승같은 취급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유학생이 이 내용을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알렸고 한국인
들은 분노에 떨어야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이 취한 입장은
"동양의 선구자인 우리가 조선인을 구경거리로 삼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는 것이었으며, 한 달뒤 일본에 거금의 몸값을
지불한 뒤에 조선남녀 동물사건이라 불린 인간전시는 한 달만에
겨우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오르세 박물관' 이곳은 인상파 회화를
비롯한 19세기 미술작품을 소장한 유명 미술관입니다.
그런데 1994년 오르세 박물관에 뜻밖에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전시품을 본 관람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것은 박제된 인간,
박제된 인간은 키 150cm에 짧은 곱슬머리, 가슴과 엉덩이가
유난히 큰 20대 중반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사키 바트만', 이 여성은 남아프리카 코이코이
부족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사키 바트만이 열다섯 살이 되던해
평화롭던 코이코이 부족에 백인들이 들이 닥쳤고 이 백인들의
무차별적인 부족민 사냥에 가족이 희생당하고 말았던 겁니다.
살아남은 자들마저 어디론지 끌려갔고, 사키바트만은 영국에
노예로 팔려가 학대 당하다가 또 다시 어느 영국 남성에게 팔려
벌거벗긴 채 우리에 갇혀 도심 한가운데 놓여졌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우리에 바짝 붙어서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인권운동가들이 이를 문제삼자
사키 바트만(사라)를 통해 돈벌이를 했던 영국인 윌리암은 노예
제도가 합법화되었던 프랑스의 동물조련사에게 팔아넘깁니다.
이후 사라는 프랑스 전역을 떠돌며 도처에 계속 전시되었으며,
매춘까지 강요당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로 옮겨온 그녀는
5년 동안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생지옥의 나날을 보내던 중
1815년 26세의 나이로 참담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것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그녀의 몸을 박제로 만들어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았고 사라는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박제품이 되어 박물관을
전전하는가 하면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세계 곳곳을 떠돌다가
1994년 '오르세 박물관'까지 전시되게 된 것입니다.
2002년 그녀의 유해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인도되기까지
힘 있는자와 힘 없는 자의 구렁텅이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람들 앞에 벌겨벗겨져 유린당했던
'사키 바트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녀의 가난한 영혼이
나사로와 같이 천사들에게 이끌려 의로운 사람들이 가는
곳에서 하늘의 위로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난한 자의 아버지,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말씀과 물님의 통찰을 통해서 밝혀지는 누가복음
16장 19~31절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힘없는 자와 힘있는 자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에 가로 놓인
구렁텅이에 벌어지는 가혹한 차별과 인간사 비극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을 억누름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요
없는 사람 동정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높임이라(잠언14:31)"
하느님의 선언은 모든 존재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불의에 대한 무감각을 일깨워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가난한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사스런 생활을
했던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가서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여기보내어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라도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도 아브라함 곁에 있는 나사로를 시켜서
목을 축여 주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나사로는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모두 같은
평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전히 나사로는 개와 같이 생전에
자신이 손을 닦고 버린 빵 부스러기를 주어 먹는 병든 거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에 살던 때를 생각해 보아라
너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안을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너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아무도 여기서 그리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이리로 건너 오지도 못한다."
아, 이 말씀이 옛날 옛적 전설 같은 이야기 뿐이겠습니까?
경제원리와 자본주의적 경쟁 구도가 여전히 시대정신인 상황에서
부의 편중과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양극화 문제는 더 심화되고
이 사이에 여전히 심한 골과 큰 구렁텅이가 놓여져 있습니다.
물님은 부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빌게이츠와 같이 세계적인 부자가 그 부를 누리는 데 급급한 게
아니라 분배와 복지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고 있지 않느냐며,
지옥에 간 부자는 자신만을 위하여 부를 남용하는 부자를 뜻하고
가난한 자를 위하여 부를 나누고 베푸는 부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결자해지' ,양극화가 가난한 자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가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부자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큼 가진자가 이를 풀어야 한다며 이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고 통쾌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물님은 루가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적고 있다며,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가난한 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섭리 앞에 마음 모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깃든 사람,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
앞으로 만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나의 태도가 어떠했으며,
나 역시 어느 순간 소유된 물건의 종이 되어 순간 부자 흉내를
내며 가난한 자를 없신여기고 차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옷깃을 여미고 참회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구렁텅이처럼 무시무시한 깊이로 우리를 초대하는 물님의 말씀
역시 순간 기록하지 않으면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아
존재의 게으름을 무릅쓰고 마음을 내어 말씀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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