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2013.12.27 06:04
제목 : “믿음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본문 : 애가 1:1-6 / 시편 137편 / 딤후 1:1-14 / 루가 17:5-10
오늘 구약 성서는 조금 어둡고 무거운 내용입니다. ‘애가’는 제목 그대로 ‘슬픈 노래’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썼다고 해서 예레미야 애가라고도 부릅니다. 이렇게 노래합니다.
“붐비던 도성이 쓸쓸해졌다.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종살이가 힘들고, 시온에는 순례자의 발길이 끊어졌다. 들리느니 사제들의 통곡 소리요, 백성들의 신음 소리, 한숨 소리 가득하고 원수들이 득세했다. 수도 시온의 영화는 어디 갔느냐?”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쳤는지, 그 처참하고 안타까운 모습을 전합니다. 바빌론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다음 이스라엘에는 이주민 정책이 강제로 시행됩니다.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와서 살게 되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지도층들, 왕족과 귀족, 사제와 주요 지도층은 빠짐없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이 때를 바빌론 포로기, 포수기 혹은 바빌론 유배기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제 시대와도 같은 시대, 암흑시대입니다. 왕권이 패망하고, 국가가 없어지고 민족조차 뿔뿔이 흩어진 시대입니다. 하느님이 세워주신 민족이라 스스로 굳게 믿었건만,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제들과 백성들은 바빌론 강가에서 눈물지으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요? 바빌론 유배 때의 아픈 기억을 담은 노래가 바로 오늘의 시편 137편입니다.
“바빌론 기슭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위에 우리 수금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는구나. 우리를 끌어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 졸라대면서 ‘사온 노래 한 가락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르랴!”
이 시편을 보면, 도무지 슬퍼서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커녕, 악기마저 수금마저 연주할 수 없어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건만 바빌론의 지배자들은 노래하라, 기뻐하라, 너희 고향 노래 한가락 들려다오, 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바빌론 포로기, 즉 민족 멸망의 아픈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비록 조국 땅은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곳 이국땅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느님은 진정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해, 모세와의 계약을 통해 주셨던 하느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와 사랑, 자손만대까지 너희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는 그 소망과 가능성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것인가?
이스라엘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내린 결론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신앙의 길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던 자신들의 불충함을 반성했습니다. 이게 그들의 첫 번째 결론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결론은, 자신들의 신앙이 너무도 편협하고 작은 울타리에 갇혀 있다는 반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뒤를 봐주시는 하느님, 어떤 경우라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내 편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식의 유아적 신앙, 아전인수식 신앙, 이스라엘 부족의 신으로, 민족의 신으로 하느님을 작고 좁은 울타리에 가두어 놓은 점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은 더 큰 하느님,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온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 그리고 온 땅 모든 사람들의 창조와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시라고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이 고난과 좌절의 시기에 이스라엘의 신앙은 한층 성장하고 한층 깊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포로기를 마치고 고레스 왕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고향으로 귀국한 유대 민족은 포로 때의 쓰라린 경험을 민족의 가슴에 담았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민족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역대기, 열왕기 등 왕들의 역사, 더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로부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율법 중의 율법이라 불리는 “모세 오경”도 이 때 새롭게 수립되고 편찬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민족의 갈 길을 다시 정립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이스라엘과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지닌 대한민국의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생각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적 반성이 부족했다,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와 비교해도, 식민지를 경험한 세계 각 지역의 독립 이후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국은 좀 부족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남북분단과 민족의 대립이라는 현실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요즈음 역사 문제로 상식 밖의 망언을 계속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아마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역사적 반성이 부족한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민족을 새롭게 세우는 기준과 원칙은 ‘신앙’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서신서와 복음서가 강조하는 ‘신앙’, ‘믿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길을 벗어났을 때 엄청난 고난과 고통의 역사로 귀결된 것과 같이, 성경은 모든 신앙공동체나 한 사람의 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 즉 예수를 믿는 자, 신앙인은 누구냐? 하느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요, 깨끗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지니라고 합니다.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지녔던 그 믿음을 지니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비겁함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난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디모데후서 1:13의 바울로의 권면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얻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활 원칙으로 삼으시오.” 한마디로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살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사실 학창 시절에 성경을 매우 진지하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도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간디는 성경을 읽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우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당시 인도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신분차별 제도,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인도는 사실 오늘날까지도 신분사회입니다. 승려(브라만), 귀족(크샤트리아), 평민(바이샤), 노예(수드라) 라는 4계급으로 구분되고, 아예 이 계급 안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 불가촉 천민(달리트)도 있습니다.
어느 날 간디는 마음먹고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크리스천이 되는 방법을 물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회 입구에 안내를 맡은 분이 간디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계급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었죠. 간디는 실망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과 계층의 위아래가 있다면 굳이 크리스천이 될 필요도 없다.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게 좋겠다.” 이렇게 생각한 간디는 결국 죽을 때까지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전혀 닮지 않았고, 닮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믿음을 더 달라고 합니다. 믿음은 곧 힘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더 큰 믿음을 달라고 청했는데, 예수님의 응답은 엉뚱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잘못된 질문을 바로잡고 계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크건 작건 상관없다. 믿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라고 말이죠. 만약에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한 크기라도 상관없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느냐 하는 것이지 그 크기가 믿음을 좌우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큰” 믿음이 아니라 “바른” 믿음, “옳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고자 하는 우직함이 더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저 사람 참 믿음이 좋다”고 하지 “믿음이 크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봉사가 많을 수 있지만, 믿음은 크거나 작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헌금도 많고 적을 수 있지만, 헌금 액수와 믿음의 분량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하늘의 상급을 의식한 봉사거나 헌금이라면, 그 액수가 크고 실적 목록은 많을지 몰라도, 믿음은 눈꼽만큼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 형편에 따라 봉사도 헌금도 클 수도 작을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크기에 상관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 라고 겸손히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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