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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중심에 섰다.

2016.05.19 23:04

물님 조회 수:6011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섰다.

      요한복음 4:43 - 54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머무신 후 예수 일행은 갈릴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 일행을 환영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하신 예수의 행동 때문이었다. 특히 성전정화 사건은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세력에 대해 반감을 지닌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환영이 언제 변덕을 부릴지 잘 알고 계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44절)는 말씀처럼 그들은 예수를 아는 사람도 아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자기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여겼을 뿐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와 병든 것을 고쳐주고 나아가 로마를 몰아내는 메시아였을 뿐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참마음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참된 인식을 전하고자 하는 예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이였다.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들을 너무나 잘 아실 뿐만 아니라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은 들어 볼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2: 24 -25)

어느 시대에나 관제 여론과 대중 매체에 의하여 움직이는 군중들이 현자를 매도하고 때로는 사상범으로 죽이는 일은 다반사로 있어왔다. 헤르베르트 마루크제는 그런 군중들을 '1차원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는 정치 현실에는 맹인이면서 미국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현실을 망각한 채 중산층과 유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선진산업사회는 대중을 노예로 부리면서도 그가 행복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음을 폭로한다. 효율성의 이름으로 산업사회를 옹호하는 대중 선전 매체는 노동자들의 이성을 도구화하고 비판을 거세하고 사회모순을 은폐한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여 버렸다. 1차원적 평면의식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사회 변혁을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노에가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고 자유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노예인 것보다 더 무서운 건 노예이면서도 노예인줄 모르는 것이다. 불행을 행복으로 착각할 때 개선의 여지는 없다. 극소수가 정치 권력은 물론 전체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탈의 구조를 유지 시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1차원적 인간들 때문이다.

세상을 꿈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각자가 지어낸 가짜 세상을 살아가다가 인생을 마치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면서 삶의 풍파에 연연하는 생존에 목을 매다가 간다는 뜻이리라. 나도 너도 모른 채 원망과 불평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언제 변덕을 부릴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지옥의 사람들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다. 생존본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리를 목말라한다는 것은 미련하게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지혜이다. (고전 1:18절)

      

참( 眞 )을 구한다는 것


진달래의 진은 참을 말한다. 우리는 참을 구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참은 거짓과 대척점에 있다. 참은 거짓의 집단이 가장 두려워하고 금기시하는 말이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조차 물으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참을 말하고 행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참이란 참을 알아보는 눈이 떠져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 눈이 멀어있으면 지구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예수는 사람들의 눈을 떠 참을 보게 하고 참으로 살게 하는 사역을 이 땅에서 하셨다.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던가를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절실하게 발견해 왔다.

 

" 나는 세상 한가운데로 와서 섰다.

그리고 나는 육체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나는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음을 알았고

그들 모두가 목말라 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 영혼은 사람의 아들들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의 눈이 멀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

또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취해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포도주를 던져버릴 때

비로소 그들은 회개할 것이다.

- 도마복음서 28절에서

 

예수는 세상 한가운데 섰다고 말씀한다. 그 말씀은 '나는 세상의 중심에 섰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나의 중심에 계시는 사람은 그가 세상의 중심이다. 그의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 세워진 건물 안에 갇혀 계실 수 없다. 예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신 하나님은 공간에 갇혀 있는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이었다. 죽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배당의 공간과 종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보다 엄청나게 큰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신앙은 내가 나보다 더 큰 나를 만나가는 과정이다. 나는 어떤 공간보다도 종교보다도 아니 이 세상과 우주보다도 더 큰 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사람이다. 그 생명은 목에 붙어있는 목숨으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해탈의 생명이다. 세상의 어떤 원소도 없어지는 것이 없다. 어떤 에너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태초의 물은 지금도 물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실상의 세계, 생명의 본질은 죽음이 아님을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셨다.

         

   집에 돌아가라


헤로데의 왕궁관리인 고관 한 사람이 가나에 계신 예수를 만나러 왔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태와 루가 복음서에는 이 사람이 백부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 8:5-13. 루가 7: 1-10) 그는 가나에서 20키로 이상 떨어져 있는 가버나움에서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의 청을 거절한 채 이렇게 말씀 하셨다.


"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 (48절)


그 고관은 예수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아들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달라고 강력하게 애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고관 아들의 사건은 가나에서 있었던 첫 번 째 기적과 유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요청하였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고관은 끈질기게 간청했고 '네 아들은 살 것이다'는 말씀을 믿고 돌아갔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하지만 그 능력이 나타나는 데는 요청하는 이의 끈질긴 믿음이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기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일으키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작은 불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