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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2013.03.28 22:33

물님 조회 수:6708

누구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마태 7: 7-11

"구하라, 받게 될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부활 주일을 앞두고 본문을 묵상해 본다. 나에게 떠오르는 말은 누구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무엇인가 열심히 간구하여 얻는 기도의 동기로 삼고 있다.

 

 입시철만 되면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에 불공드리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능 자녀를 위한 특별 100일 기도회 ' 현수막이 걸린 교회도 볼 수 있다. 무엇인가 아쉽고 답답해지면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로부터 그것을 받으려 하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확인이다. 즉 내가 구하는 대상인 하느님을 내가 어떤 하느님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알려준 하느님의 얼굴이 다르듯이 사람들은 각자가 신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이미지가 그 사람에게 신을 대변해준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자신이 투사한 반사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느님을 믿는 것과 하느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은 애벌레와 나비가 다른 것처럼 차원이 다르다.

 

자기가 그려낸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그 하느님에게 기도를 하는 것은 신념의 영역인 마인드 콘트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예배당을 오래 다닌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자기가 예수를 잘 알고 있으리라는 착각이다. 그런 현상은 이 천년전 예수 당시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과 다를 바가 없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를 안다. 그는 나사렛 출신으로 목수의 아들이지. 그는 별로 신통하지 못해.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어중이떠중이 모아서 돌아다니는 선동꾼에 불과한자야. 우리는 그를 대단찮게 여기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알고 있지-" (마태 13: 54-58참조)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인생이다. 한 송이 꽃을 보건, 그림을 보건, 사람을 보건, 내 의식이 어디까지 와 있느냐 하는 만큼 보일 뿐이다. 육체의식으로 보면 예수의 껍데기만 보일 것이고 영성과 신성을 자각한 의식으로 보면 그만큼 예수가 보일 것이다. 천국을 보장하는 부적으로 , 현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슈퍼맨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나 그 옛날 광야에서 예수에게 떡 얻어 먹고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이나 여전히 다를 바가 없다.

 

 

예수는 떡을 먹고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주고 싶은 떡은 목구멍에 넘기는 떡이 아니라 하늘의 떡, 나(I AM)라는 존재의 살아있는 떡을 주고 싶다고 탄식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절규했다. 그런데도 오늘의 교회 현실을 보면 여전히 예수 당시의 군중들처럼 보이는 떡만 구하고 찾으려 할 뿐 그리스도 예수가 주고자 했던 '산 떡'을 찾는 사람이 드문 형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기도해야 할까?

 

루가 복음서에 "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참생명)을 얻으라" (21:19) 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밝혀주신 우주의 숨겨진 법칙은 유한한 물질 세계에서 물질 몸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요한복음서는 줄기차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으로 채워져 있다.

 

베다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은 자라 할지라도 살게 되리라. 내 안에 살고 나를 믿는 자는 누구도 결코 죽지 않으리라. 너는 이를 믿느냐?" 이 물음 앞에서 마르타는 " 그렇습니다. 주여,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세상에 오시기로 하신 분임을 믿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11: 25-27)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길, 하느님이 우리를 지구에 보내신 결정적인 목적이 영생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증거가 예수의 부활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부활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씨앗이나 식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육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 짐승, 새, 물고기가 각각 다 다른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도 있고 땅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땅에 속해 있는 아름다움과 영광과는 다릅니다.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 하나하나에도 아름다움과 광채에 차이가 있습니다." (15:39- 41)

 

별마다 광채가 다르다는 말은 각 사람의 영에서 나는 광채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이다. 각 사람의 별은 각 사람의 신성한 몸이고 신비가들이 말하는 코잘체이다. 하느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한 노력과 인내로 얻어진 성취의 등급과 수준을 바울은 보았던 것이다. 인간은 물질계로 들어온 하늘의 별이다. 바울은 별과 별의 빛 차이를 보았고 그것은 부활의 때에 분명해 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6세기 독일의 구두 수선공이었던 야곱 뵈메는 그의 고백록에서 자신 안에 빛나는 존재의 별에 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만물의 하느님은 바로 그 단 하나의 몸이시다. 그러나 죄야 말로 그대가 그를 온전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죄와 함께, 죄로 인하여 그대는 이 커다란 신성의 몸 속에서도 썩어질 육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뼈 속의 골수가 살로부터 가리워져 있듯이 하느님의 힘과 덕은 그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대가 영 안에서 육신의 죽음을 돌파하면, 그 때 그대는 숨겨진 신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썩어질 육신은 생명의 흐름에 속한 것이 아니라서, 빛의 생명을 자신에 고유한 것으로 받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가운데 있는 빛의 생명은 육신 가운데 일어나 스스로를 향하여 발생하며, 그로부터 빛을 알고 이해하는 또 다른 천상의 몸, 살아있는 몸이 생겨난다. "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몸이 태어 날 수 있도록, 내 안의 신성한 몸이 밝은 별처럼 빛이 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내 안의 나(I AM)가 보다 정화되고 밝아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