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자 -이탁오(李卓五)
2022.03.28 06:36
“부유함에 있어 항상 만족을 아는 이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없고,
고귀함에 있어 능히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보다 더 고귀한 사람은 없네.
가난함에 있어 식견識見이 없는 이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고,
미천함에 있어 줏대가 없는 사람보다 더 미련한 사람은 없나니
몸에 장기長技가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막힌 것이요,
벗이 사방에서 찾아오는 것이 바로 뚫린 것이라.
평생의 부귀영화라도 요절夭折에 불과하고
만대에 이르는 영원한 믿음이라야 장수長壽한다고 할 것이다.“
富莫富於常知足 貴莫貴於能脫俗 貧莫貧於無見識 賤莫賤於無骨力
身無一賢曰窮 朋來四方曰達 百歲榮華曰夭 萬世永賴曰壽
중국의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의
<부유함에 있어 항상 만족을 아는 이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없다.(富莫富於常知足>
라는 글.
* 이탁오(李卓五)의 동심설(童心說)
이탁오(1527~1602)는 명나라의 사상가로 본명은 이지(李贄)이다. 명나라 말기의 중국사회는 근대화로 향할 것인가, 쇄국을 선택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런 시기에 태동된 이탁오의 사상은 사(私)와 욕(慾)을 긍정하는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근대적인 개인성을 긍정함으로써 중국사상에 흐르던 이타주의보다, 이기주의적인 본심을 감추고 있는 주체성을 동련 등장시킨다. 그와 동시에 이탁오는 욕망을 긍정했는데, 욕망을 금기시하면서 도덕적으로는 위선적인 행태를 보이던 당대의 상황을 한 단계 넘어서서 욕망을 통해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품은 것이다.
이탁오 사상의 핵심은, 양명학파가 따른 참된 마음인 진심(眞心)에 대한 논의에서 아이들의 마음인 동심(童心)에 대한 논의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동심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아이 때의 마음이다. 이탁오는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들의 가름침의 정수는 바로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당대의 분위기는 아이들의 욕망은 짐승과도 같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정에 닿으려면 혹독한 교육과 훈육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 아이들의 마음, 즉 욕망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매우 이단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탁오의 동심설이 바라는 대로 세상이 아이들의 욕망을 통해 재조직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프로이트는 그의 말년에 욕망을 충동(impulse)으로 격하시키면서 어릴 때는 누구나 반사회적인 충동과 준범죄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순수하며 창조적인가를 알 것이다. 세상에 대한 고정관념이 하나도 없는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어쩌면 현대사회가 가진 갖가지 문제를 풀 해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마음이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살펴야 동심설의 진가가 드러난다. 아이들의 생각에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고정관념이 없다. 그래서 책상을 보면 마법의 기차, 수술대, 은신처, 보물 상자 등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하다. 아이들의 마음에는 A는 B이기도 하고, C이기도 하고 D이기도 하다. 이렇듯 고정관념이 없고, 호기심이 넘치며, 생각의 자유로운 횡단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이다. 만약 아이가 어떤 것에 호기심을 보인다면 그것은 고정관념을 체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지를 유영하듯 생각을 횡단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들은 대화하고 놀면서 대부분 각자의 세계관과 마음속의 질서를 따라 각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자기만의 가상적인 인물을 만들어 대화하고 놀기도 한다. 동심은 객관적인 표상으로서의 진리와 도를 공부하고 따르지 않으며, 각각이 이미 자기만의 진리와 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진심과 도를 알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책을 읽고 규칙에 따를 것이 아니라 각자 동심으로 돌아가 자기가 만든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 세상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세계를 재창조해내려는 욕망의 자율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탁오의 <분서>를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몰래 수입해온 사람은 당시 광해군의 비자금을 당당하던 허균이었다. 그는 광해군의 비자금으로 숨겨둔 은괴를 몰래 횡령해서 중국으로부터 책을 사 모았는데 그중 <분서>를 비롯한 이탁오의 책들이 있었다. 그는 동심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를 소설화할 구상에 이른다. 허균은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서자들의 삶에 주목해 그들이 겪은 차별과 신분상승의 봉쇄를 소재로 상당히 이단적이고 반역적인 생각을 소설화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혁명과 유토피아에 이르는 실천 과정을 요즘의 판타지소설과 같은 책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홍길동전>이다.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아이’였으며, 어지러운 놀이처럼 도술을 부리는 신통방통한 아이였고, 기성제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혁명적인 아이였다. 또한 율도국 건설을 위해 떠나가는 아이이기도 했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동심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문학적 서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동심설을 다시 생각해보면, 현대문명 속에서 사는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식민화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다양한 놀이 모델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일 때, 어른들은 바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라는 의료적인 틀을 갖다 댄다. 사실 생각이 이리저리 횡단하며 다양한 의미좌표를 넘나드는 것은 동심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홍길동전>에서는 그것을 도술로 표현했지만, 도술과도 같은 신묘한 원리가 아이들 마음에 존재한다.
어른들의 세계인 기존 문명은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어른들의 세계는 고정관념을 통해 등가교환을 하고 기성 제도를 유지하는 속성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지럽게 놀고 시끄럽게 울어대면 어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를 빨리 원상 복구하고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는 마치 옛 성인들이 통제만이 교육이라고 가르쳤다는 듯 아이들을 똑바로 앉혀놓고 어른과 같은 행동을 하도록 훈육한다. 현실교육은 이렇듯 동심에 대해 체계적이고 기계적인 억압을 가한다.
이탁오는 감옥에서 비명횡사를 하면서도, 색다른 세계가 우리 안에 있고 미래에는 그것이 구체화되리라 전망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욕망은 그 자신이 열망하고 꿈꾸었던 세상으로 향했을 것이다.
신승철·이윤경/ ‘철학의 참견’중에서 송담님의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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