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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양의 승리잔치에 초대  

 


 

어린 양이 앞으로 나가더니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다(7)

그들은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요한계시록 59)”

 

오른 손은 주는 손이고 왼손은 받는 손이다.

전쟁을 할 때도 왼 손으로 방패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칼을 잡는다.

오른손은 파워, 힘을 상징한다. 감성과 영성의 뇌가 우뇌라면 뭔가 판단하고 분석하는 이성의 뇌가 좌뇌다. 오른손이 가지는 힘, 절대 주권, 왼쪽은 정의이고 오른쪽은 사랑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카발라에서도 나타내는 생명나무 도형도 왼쪽 기둥은 정의, 오른쪽기둥은 자비 그 중심에 연민의 영이 있다. 연민을 가지고 양쪽을 쓰라는 뜻이 아닌가?

여기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향한 절대주권,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그 손에 두루마리가 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에 글이 씌어 있다고 전합니다. 이는 두루마리의 내용이 온전하다는 뜻도 있지만 구약 에스겔서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말이다.

에스겔서 210절에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다. 에스겔은 유대인이 바빌론에 끌려갔을 때 함께 했던 예언자이고 당시 민중들이 절망했을 때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분은 온 우주에 편만해 계시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비전을 보여준 예언자이다.

두루마리의 앞뒤에 글이 적혀 있었고 그 내용은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배경에는 적과 싸우다가 져서 왕과 귀족들이 끌려가고 백성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에서 그 자리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밖에 없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요한은 이 내용을 빌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고를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다. 그 두루마리에는 역사의 반성이자 악에 대한 심판이 두루마리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쓰여 있는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변함없다. 그걸 더 강조하기 위해서 완전 숫자 하늘의 숫자 3과 땅의 숫자 4를 포함한 완전 숫자 7을 사용하여 7번 봉인했다고 나온다. 이 내용의 배경은 고대 이스라엘과 그리스 로마에서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양가죽이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안팎으로 글을 썼는데 안에는 모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겉에다는 약식으로 썼다. 이란에 에스더 묘가 있는데 지하에 유대교 예배당이 있다. 바빌론 포로가 끝나고 다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날까지 예배드리고 있는데 고대에 보았던 두루마리 성경이 거기에 있다. 두루마리 겉에 이 내용 이러저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약식으로 쓰여 있었다. 안과 밖으로 글씨가 쓰여 있다는 것은 두루마리로서 어떤 내용을 기록함에 있어 하자가 없는 두루마리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봉인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결정적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그 두루마리 안에 들어있는데 그걸 열어야 집행을 할 수 있는데 열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다. 영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보이지 않는다.

요한은 그 봉인을 열 존재가 요한의 우주관 속에서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해 절망했다.

이 이야기는 요한이 통곡을 하는 그 눈물은 슬픔을 대변하는 눈물이다.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 질 때 교회가 어마어마한 핍박을 받았다. 말로 할 수 없는 피바다를 이루는 로마의 학정 밑에서 요한계시록이 쓰여 졌다.

주기철 목사님이 쓰신 찬송시처럼 계시록은 절박한 시대에 절박한 언어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열 존재가 없다는 점에서 가슴이 미여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 실현되는 것인지 이런 지옥 같은 상황이 계속적으로 이어져야만 하는가? 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여져서 눈물 흘리고 통곡했다는 내용이다.

5절에 24장로중의 한분이 울지 말라고 외친다. 보라 유다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셨으니 그분이 이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떼고 펼칠 것입니다(5)

힘과 위엄의 상징이다. 여기에 하필 사자가 왜 등장하는가? 이것은 유다지파 야곱은 12지파의 시조들이 아들을 축복할 때 야곱은 유다를 특별히 사랑했던 것 같다. 유다는 힘이 좋았다. 용감한 사람이다. 아버지로서 유다를 축복할 때 너는 사자 같다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유다지파의 상징이 사자다.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사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유다지파 사자 가문의 후손으로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예언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서 나온 메시아이다. 그 메시아가 어린양인데 왜 어린양으로서 역할을 하시분이냐 하는 것이 9절의 내용이다. 죽임 당하셨던 주께서 하나님께로 각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가운데서 피로 대속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원수들,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자이기 때문에 메시아이고 어린양이다. 6절에 보면

어린양이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그 앞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있었다. 역설적 표현이다.

요한복음 1914절을 보면 유월절이 15일인데 그 전날 14일 낮 12시쯤에 어린양을 잡아 죽이는 그 시간대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한다. 그 사건을 요한은 요한복음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님을 희생재물인 어린양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서의 배경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애굽에 재앙이 내리는데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의 모든 장남들이 죽게 되는데,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 그리하면 재앙이 비켜갈 것이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나라를 세우고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킨다. 유월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고 살려주셨고 또 그 일 후에 우리를 광야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유월절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민족적이고 핵심적인 축제다. 행사의 핵심은 어린양을 잡아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교회는 동물을 잡아 바치므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신약교회는 예수님이 한방에 자기 자신을 재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동물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이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요한사도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제단에 바쳐진 존재로 기억한다. 예수님에 대한 구원사건으로 해석을 십자가 사건을 조명해 본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57절에서 누룩과 같은 인간을 여러분 가운데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순결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희생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유월절의 희생양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푸는 열쇠다. 6절에 어린양이 살해된 것처럼 서 계셨다.” 이 표현을 보면 우리가 볼 때는 분명히 죽은 양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살해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양은 한 번 죽으면 끝이지만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자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 양은 서 계신다는 그 말이다. 일어서기 위해서 살해된 죽게 된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 의해서 눕여질 수 없었다. 일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가운데서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심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주권자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순교에 의해서 피를 흘리신 분들도 로마에 의해서 쓰러졌다고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분들이고 쓰러졌지만 일어서서 계신분이라는 뜻이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깨우침과 힘을 주기 위해서 쓰여 지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이 여러 상징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곱 영이 사람에게 임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로 임하고 용맹함으로 임하고 창조적인 예언의 능력으로 임하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곱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모든 사람에게 다 연결되어져 있다. 하나님이 배푸시는 모든 선물의 총칭을 일곱이라는 숫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금대접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것이다. 각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들이 있다. 그 당시를 보면 그 당시 성도들이 처했던 절박한 하나님을 향한 그 기도, 즉 구원의 내용이다. 아마 그들이 드렸던 기도, 정말 악마적인 폭력으로부터 이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그 기도, 그 기도들이 응답이 된다면 어떤 식으로 응답되겠는가?

여기서 새로운 노래는 구원의 승리의 노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혁신적이고 참신하고 회기적인 그런 방법으로 이 시대에 구원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다. 죽은 줄 알았는데 서 있다. 이런 표현이 무엇인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새롭고 결정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만물이 새로워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데 그 때 우리가 불러야 될 노래가 새 노래다. 인간의 의식은 낡은 사고를 털어내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한다. 애완견처럼 살지 않고 두려움에 파묻혀 살지 않고 두려움의 무덤을 깨고 나가는 것 지구 자체의 무덤은 삼차원의 의식이 인간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이 인간의 무덤이다. 내가 생명의 존재라고 한다면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새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다.

사고방식이 자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지구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나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이것을 말하고 있다. 공포심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절박성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나? 내가 정말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물도 없이 물레방아를 돌리려고 하는 허무한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삶의 물레방아를, 인생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릴 수 있는 그런 창조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신다. 어린양의 승리의 잔치에 초청하고 있으며, 그 초청장의 내용이 매 장마다 이어지고 있고  4장까지가 전반적인 내용이라면 오늘 5장부터의 내용이 초대장이다.

 

 

                                                                    'sial(201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