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안(경교)의 영성
2016.06.02 15:27
네스토리안(경교)의 영성
물 이병창
중국이 개방되어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옛날에 중국에 복음을 전했던 경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로마교회 밖에서 활동한 ‘잃어버린 교회사’의 한 측면을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성과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에니어그램의 원형과 진실을 찾아내고자 추적하는 과정에서 중앙 아시아를 여러 차례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 때서야 경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에니어그램이 수피의 일부 구전 전승에서 유출된 것이라고 하지만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구르지예프가 중앙아시아의 수피 전승에서 에니어그램을 전수 받았다고 말한 것 때문에 에니어그램의 역사적 진실이 오해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터키와 중앙아시아의 수피는 천년의 기독교 전통을 가졌던 동로마, 곧 비잔틴제국의 영역과 중앙아시아의 네스토리안 전통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현재의 키르키스탄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중심 지역에는 시리아와 페르시아에서 박해를 피해 탈출했었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공동체 유적지가 시장이 있었던 성채에 발굴되어 있었다. 중앙아시아가 고선지장군이 패배하여 이슬람화 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영토였다. 양귀비의 수양 아들 노릇을 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성장했다가 난리를 일으킨 안록산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사람이었다. 중국의 대표 시인 이백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키르기즈스탄의 토크목(Tokmok)시 라고 그 지역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는 중국의 영향 아래 있을 때는 실크로드의 중심이었고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무대였다.
네스토리안과 경교
네스토리안이란 시리아출신이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로 재직했던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1)는 그리스도의 이인격설(二人格說)을 주장했다는 비난과 함께 교황의 마리아 신모설(神母說)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교권파인 시릴(Cyril) 일파에게 몰려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정죄되어 이집트에서 유배 중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추종하던 시리아 그리스도인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로마교회가 보낸 군대에 의한 대박해를 피해 페르시아 영내로 들어갔지만 오랜 세월 로마와 적대적이었던 페르시아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 입장에서 보면 로마 영역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세가 확장되면서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토착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와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이슬람화 되면서 박해가 본격화되자 네스토리우스교인들은 아라비아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일대로 떠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신인설, 성모 마리아의 신모설을 부정하였다. 때문에 당시에는 이단으로 몰려 추방되었다. AD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안디옥 학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다시 한 번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역사의 발걸음을 두 걸음 앞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정치 사회적 환경 때문에 시리아와 페르시아에 근거를 둔 네스토리안들은 몽골제국 시대에 동서를 연결하는 주요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와 초원길을 따라 아시아의 동부와 북부, 중국으로 이동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635년 네스토리안들에 의해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를 경교라 하는데, 경교는 중국에서 중요한 종교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만주지역 까지 영향을 미쳤다. 경교의 영향력은 1956년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가운데 석제 십자가, 동제 십자가, 마리아관음상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교와 관련된 유물들은 가야박물관과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 태종(太宗) 때였으므로 각 지역의 문화와 종교가 모두 포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 경교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어 당나라의 황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폭넓게 전파되었다. 781년 경교의 중국 전파에 있어 역사와 실태를 증언해주는 귀중한 자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세워졌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이다. 남한산성에서 기와 한 장이 60키로그램이나 되는 거대한 건축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나라의 경교를 믿는 장군들의 예배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아펜셀러 언더우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로 소급해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경교의 영향과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당 태종은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일행을 장안에 머물게 하여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파사교(波斯敎)라 하고 교회당을 '파사사'(波斯寺)라고 하였다. 고구려에 대패한 바 있는 당태종은 중국 역사에서는 가장 추앙 받는 왕이다. 구범회의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라는 책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네스토리안들을 환대했다. 638년에는 태종(太宗)이 장안에 대진사를 건립하여 승려 21명을 배속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경교 신자들은 이미 당나라 이전부터 중앙 아시아 일대에 거주하였었다. 양귀비 때문에 유명한 현종(玄宗)이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개칭하여 '파사교'는 '파사경교'(波斯景敎)로 되었다가 뒤에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진'이란 로마의 중국식 이름이다. 당의 덕종(德宗)때인 781년(建中 2년)에 세워진〈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는 635년에서 781년(덕종 )까지 경교의 역사가 이 비문에 수록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경교 신도를 경중(景衆) 혹은 경사(景士)로, 경교사원을 경사(景寺), 본존(本尊)인 미사가(彌師訶)를 경존(景尊)이라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경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경교의 영성
당나라 때 경교의 주장은, ① 일신교(一神敎), ② 제왕 숭배, ③ 왕법 위본(王法僞本)주의, ④ 부모 효양(父母孝養), ⑤ 보시(布施) 장려, ⑥ 선악 이도(善惡二道, Didache)의 교회를 신봉하고 있었고, 펠리오(P. Pelliot)가 1908년 돈황(敦煌)에서 발견한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 및 《존경》(尊經)에 의하면, ⑦ 삼위일체설의 신봉과, ⑧ 세례 및 영성체(領聖體)를 행하고, ⑨ 품급(品級)을 경교회의 전례(典禮)로 하고 있었다. 경교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타협하여 충효, 호국(護國)의 가르침을 수용함으로 토착화했다. 그러나 무종(武宗)이 도교(道交)를 믿게 되면서 845년 종교탄압의 결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당(唐)나라 초기에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다. 약 400여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던 경교는 원(元) 때에 와서 일시적으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1289년) 이때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는 명칭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 또는 '타르사'(達娑, Tarsa) 라고 불려졌다. 야리가온은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닌 몽골어 '아르카운'(Arkaun)을 음역한 것이었다. 원의 경교 사원인 십자사(十字寺)가 72개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교는 원의 멸망과 더불어 그 터전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네스토리안들의 열정과 포용적인 선교 방식에 의해 6세기에서 14세기까지 기독교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었다. 특히 몽골 제국 시대에 중앙아시아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강력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바탕을 전제하고 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친 경교의 영성을 말해야 할 것이다. 경교를 비롯한 네스토리안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의 포용적 태도일 것이다.
로마교회는 정치권력과 교회가 한 몸과 같은 관계였기 때문에 신학과 교리의 힘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는 방식의 투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교회사는 하나님의 일그러진 얼굴이라 할 만큼 교회의 본질이 왜곡되었다. 서구 교회사에 피 냄새가 많이 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면 동방교회인 네스토리우스파는 서방교회 중심의 기독교사에 밀려 소외되고 잊혀져 있지만 교리 논쟁으로 인한 분열 없이 공동체적 삶과 이방민족을 섬겼던 그들의 업적은 세월이 갈수록 빛이 나고 있다. 믿음은 수난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을 그들은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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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유네스코에 의해 발굴된 키르키스탄의 네스토리안 공동체 유적지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수도원적 삶과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난의 여정을 전전한 사람들로서 타민족과 그들의 문화를 존경하고 현지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런 면모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길을 지향해야 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성찰해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그들의 공동체적 영성은 중앙아시아 일원에 그치지 않고 중국 땅까지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비록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앙아시의 네스토리안 교회는 이슬람 세력에 의하여 몰락에 이르지만,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동서양의 문물과 복음의 통로 역할을 했었던 네스토리안들의 피어린 여정과 삶으로 드러난 신앙은 다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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