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2007.06.04 22:29
<2007.3.11 주일설교>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이병창목사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본질을 요약한 장입니다. 믿음이란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에는 또 우리들 귀에 어떻게 들리셨는지 잠깐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춤꾼님은 히브리서 기자의 믿음에 관한 말씀을 읽고 본인의 믿음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하셨는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건데 이왕 바랄 거 크게 바라야 되겠다, 아프리카에 학교가 한 개가 아니라 사십 개가 지어질 수 있도록 크게 바라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볼 때는 충분히 인정받는 거 같은데…. 기왕에 화살을 잡았으니까 토끼 잡는 것보다는 호랑이를 한번 잡아보겠다는 그런 뜻으로는 들립니다. 생각 하나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죠. 영석님은 소식이 어떻게 왔나요?
5절 뒷 부분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얼마나 흡족하게 생각하셨는지 기록되어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면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 어르신들 중에 가장 큰 어르신인 하나님께서 나를 흡족해 하실까, 살면서도 어른들이 많은데 그분들께 참 흡족하게 해드리고 또 인정받지 못하고 살지 않았나, 그래서 가슴이 찔리네요.
어른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수피 예배를 참석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 예를 들어서 세마라는 제자리서 도는 춤을 출 때 아이들도 나오고 어른들도 나오고 그러는데, 중심에 나갈 때는 어른들, 노장들한테 꼭 이렇게(가슴 높이에서 한 손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개 얹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듯) 절을 하고, 뭔가 예를 표현하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노장들의 눈빛, 그것은 정말 흡족한 표정이었던 것이 내 마음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에서 크는 사람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말이 필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들어갈 때도 꼭 절을 하고, 무언의 오고가는 그 느낌들은 그 사람들의 큰 유산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셨나요?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를 보면서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는데, 살다보면 때로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여기 죽음의 사람들을 쭉 열거를 하면서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과감히 믿음의 길을 갔기 때문에 죽은 이후에도 이루어진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은 진인사의 삶을 살아가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2절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를 했는데, 죽을 때 유언을 남기기를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내 유골을 가지고 가라해서 출애굽할 때 그 유골을 가지고 갔어요, 그 목적지가 어딘지 아세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천하의 명당을 찾은, 하나님께서 내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어디일까, 그 땅을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지목한 거지요. 그래서 그쪽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너무 존경하니까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 그 누구의 땅이건 굴이건 다 주겠다고 그렇게 제안을 했어요. 그럴 때 ‘노’ 하고 아주 비싼 돈을 많이 줬어요,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공회를 열어서 말이죠. 아브라함은 수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빨리 대답을 해요. 내 후손들은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번성할 것을 알았죠. 그 막벨라 굴이란 곳은 시내산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포인트 지점이죠.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이고,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 유골을 가지고 출애굽을 할 때 그 쪽으로 갔다가 잡은 거지요. 요셉이나 아브라함이나 다 보면 먼 미래를 통찰한 사람이죠. 또 어떻습니까?
13절요, ‘참고향’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세상 일이 힘들거나 힘들지 않거나 행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건 참고향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요즘은 제가 기도하는 게 아기를 갖는 거예요. 예전에는 하나님이 아기를 주실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올해 기도하며 준비해보고 주시면 주시는 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고, 안 주시면 또 다른 더 좋은 것을 주시려나 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으로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침묵 기도 - 41초 동안)
권미양님은 지금 어디를 그렇게 보고계신가 궁금해지네요. 오늘 모자가 멋있네요. 나는 모자만 보면 내가 꼭 써 보고 싶어요. 몇 절입니까?
저는 그냥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잖아요? 11장을 다 읽고 나니까 성경을 한 권 다 읽은 것 같은 그런 내용들이 쭉 나열이 돼 있는데,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이 살기도 하고 아픈 사람이 낫기도 하고, 또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톱에 몸이 짤리기고 하고, 또 조소를 당하기도 돌에 맞아 죽기도 하잖아요. 이렇게 너무나 극한적으로 다르게 우리 삶에 나타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믿음의 힘으로 그걸 선택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자유....... 믿음이란 의식이예요, 우리 인간의 의식입니다. 불신도 의식이고, 믿음도 의식입니다. 의식의 신념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뜰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과학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500만전 지나면 태양이 사라질 거랍니다. 언젠가는 태양이 식어요,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날 동안에는 태양이 견뎌줄 겁니다. 그 때쯤으로 우리가 가서 ‘일간에 하여간 태양이 식을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세상이 굉장히 불안하고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잖아요? 다 믿음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다음 주 몇일 날 약속을 한다면 ‘그 날까지는 최소한 살아있을 거다, 하나님께서 불러가진 않겠지, 설마하니…’ 이런 믿음이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삶의 밑을 구성하는 의식의 체계가 이게 믿음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 고장 난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 누군가를 믿었는데 배신을 당했다든가, 버림을 받았다든가 하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밑에는 불신이 있어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의식은 기본적으로 깔린 거예요.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축구로 말하면 주전 멤버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관점으로 보면 성서는 믿음의 책이라는 거죠. 믿음의 책! 히브리서도 믿음이 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거죠. 이 히브리서 기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글이란 걸 보면 무식한 사람이 썼나, 조금 가방 끈이 짧은 사람이 썼나를 바로 알잖아요, 이 원문을 보면 히브리서는 굉장히 고급 문체입니다. 뭔가 한 통을 탁 한 분으로 그러니까 믿음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성경 한 권을 읽은 거 같다는 느낌이 들게끔 이게 요약을 잘 해주고 있잖아요. 그러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테마입니다. 이 믿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분들이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그 부분을 교리적인 차원에서 집대성을 하셨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믿음으로! 에배소서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길 ‘믿음으로 인간은 의에 이르고, 그 의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표현들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 그런데 뭘 믿어? 믿는다는 건 기본인데, 뭘 믿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얘기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만났고 그 분을 믿었던 사람들인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거죠. 이번 생애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애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도하신다, 그걸 믿는 사람들이란 거죠. 그러니까 이생에서 가질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래는 우리가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온 하나님이 미래엔들 같이 안 가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불안할 때, 요동칠 때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한 생애의 삶을 잘 사신 분들의 이야기를 요약할 수가 있는 거죠. 믿음의 시조가 누굽니까?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예스맨이죠. 사람들 앞에서는 용맹한 사람이죠. 자기 조카가 붙잡혀 갔을 때 전투를 해가지고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를 해서 전과를 올리잖아요? 전략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잖아요? 가라, 하면 가고, 멈춰라, 하면 멈추고. 바치라, 하면 바치고, 철저하게 예스, 예스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조가 된 거죠. 그런 류의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이 히브리서 11장인 거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하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믿는 사람들하고 전혀 세상이 달라요. 제가 어려서부터 우리 앞에 계시는 어머니 덕분에 예배당을 다니게 되고, 우리 가문에서는 첫 크리스찬이십니다. 성서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죠. 그러니까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는 연장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자주 쓰는 말, ‘늙은이’라는 말? ‘늘 그런 이’, 늘 그렇게 사는 이. 그래도 모세는 80세에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돌아가고, 40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했어요. 모세는 죽을 때도 고상하게 죽었어요.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심는다, 그게 신앙이죠. 그게 믿는 이의 태돕니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라면 사과나무를 심는 거예요. 뻔히 알아요,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그거 사과나무 심으나마나 하니까 사람들은 안 심겠지만, 나는 심겠다는 거예요. 어제의 나로부터 큰 엑스도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성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고 있냐면 떠날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이 지구에서 살만큼 살다가 ‘와라’하면 ‘예’하고 가볍게 가라는 거예요. 그게 믿음을 가진 사람의 힘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까 제가 숨 쉬는 거 심장이 뛰는 거 느껴보라고 그랬죠, 왜 자꾸 이걸 하라고 하겠어요, 내 심장이 뛰는 건 내가 뛰라고 해서 뜁니까? 내 의지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심장이 뛰는 건. 폐가 움직이는 건, 여러분, 숨 안 쉴라고 해서 안 쉬어져요? 들리는 거, 내가 안 들을라고 해서 이 소리가 안 들립니까? 이게 들리잖아요. 머리카락, 이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들이 염려한다고 해서 머리카락이 안 자라냐 이거죠, 이 세상은 다 알아서 가고 있어요. 내가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지극히 적은 거예요.
이 지구가 자전하고 또 공전하면서 태양계가 움직이고, 이 우주가 다 움직이고 있는데, 빈틈없이 가고 있는데, 정말 빈틈없이 가고 있어요,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를, 1년 동안 공전, 자전을 하면서 계절이 나오잖아요? 낮과 밤이 연출되잖아요? 이게 빈틈이 있습니까? 추호라도 빈틈이 있다면 모든 질서가 깨져버리죠. 지금은 눈발이 날리지만 아침에 칡뿌리를 깨보니까 벌써 달라 싹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또 태양과 이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한 생애를 살다가 다 한 이치로 가고 있잖아요? 이 우주의 움직임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권능이 있어, 움직이게 하는 이가 있어, 그런 삶을 내 삶 속에 받아들이고, 그 권능을 내 권능으로 삼는 거예요. 그 플러그를 꽂는 게 믿음인 거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주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힘, 그 권능을 믿는 것이 믿음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맹목적인 게 아니라 게시적인 믿음이라는 거죠, 게시적인 믿음! 성경이 얘기하는 건 게시적인 거죠. 나의 신념을 믿는 게 아니라 내 신념, 그 이상의 세계를 믿는 거죠. 원불교 대학원 수련회에 나를 두 번째 불렀을 때 이심전심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이심전심을 아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학원생한테 이런걸 아냐고 물으시는 거냐는 표정들이에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메모리로서 안다는 것도 있고, 인간의 의식으로써 인식하는 차원에서 안다는 것도 있고, 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성경은 게시로 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심전심은 초등학생도 안다고는 할 수 있어요, 사전적인 지식으로 알 수 있죠. 여러분들이 지금 이심전심이라는 이 말을 수도 없이 쓰고 있는데, 용타스님도 저기 전시해 놓은 항아리에 남긴 말이 일체유심조인데, 둘이 서로 마주보고 이심전심 말하지 말고 둘이 한번 통해 보아라고 했죠. 한참 후에 소감나누기를 했는데, 남자 눈을 처음 보았다고들 했죠.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이렇게 마주보고 눈을 깊이 들여다본 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원불교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여성의 시대가 올 거다는 것, 원불교의 힘은 여성들에게 있습니다, 그걸 시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그게 창시자의 믿음이죠.
자, 그러면 이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든 차원에서 물리적 차원이건, 우주적 차원이건, 인간의 심성이건, 영성이건, 모든 차원에서 쉬지 않고 선을 향해 움직여가는 어떤 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힘이다 이겁니다. 그 힘을 자각하는 것을 게시라고 합니다. 이 게시의 의미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해요. 내 인식의 한계를 얼마든지 무궁무진하게 뛰어넘는 차원이 있다는 거죠. 우리 눈은 아주 지극히 좁은 거라고 말했죠. 그런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을 조절하려고 헛심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살자는 거죠. 예를 들어 여기 냇가에 가면 검정 쇳가루가 있어요, 그걸 손가락으로 집어서 올리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자석을 갖다 대면 어때요? 원리죠. 단 한번에 모래밭을 휘적거리면 자석에 다 붙잖아요? 그러한 이치를 .........그게 게시적 차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에요. 예를 들어 자동차가 고장이 났어요, 실력도 없는데 자꾸 뒤적거리면 어때요? 더 큰 고장을 만들 뿐이잖아요? 아프리카에서 카바넷 가다가 차가 고장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다 서요, 서는 건 좋은데 다 드라이버 가지고 와서 고친다고 하지만 성의와 마음은 좋아요, 그런다고 차가 갑니까? 그래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런 지혜를 얻는 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무엇이 나를 파괴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이걸 깨닫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믿음의 내용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게시적 차원의 앎에 이르는 믿음!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어려서 부흥회에 가보면 아, 믿음을 뜨겁게, 믿음을 강하게 가져야한다고 해요. 도대체 믿음을 뜨겁게 가지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않죠.
이 자연계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어요. 열역학의 법칙도 있고, 만유인력의 법칙, 음양오행, 또 햇빛이 비치면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고, 바다에서 플랑크톤이 광합성 작용을 해서 산소를 내뿜으면 우리 지구인들이 이걸 먹고 살아요. 이 산에 있는 나무들 덕에 우리가 산소를 먹고 산단 말이죠. 그런데 그 이치를 안다면 나무를 파괴하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아 그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이렇게 알잖아요. 파괴하는 일을 모르고 했다면 이제는 아니까 않는 거예요. 믿음도 그런 거지요. 믿음도 이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크하르트라는 분이 신념의 믿음에서 빨리 깨달음의 믿음으로, 이해하는 믿음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법칙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법칙이 뭐냐면 사랑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노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과일나무를 잘 보아라, 어떤 나무도 자기가 먹으려고 열매를 맺고 사는 나무는 없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不自生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오래가는 거다. 나무도 이렇게 가고 있는데, 왜 인간들은 나의 이익을 위한다고 남을 해치고, 이런 일을 할까? 不自生의 도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생명의 법칙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성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발명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겁니다. 내가 신념을 강하게 가지면 열역학의 법칙이 어떻게 변합니까? 그런 게 아니죠, 법칙은 그냥 법칙일 뿐이죠. 사랑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는 곧 지성의 문제인 겁니다. 인간이 지성이 없어 어리석기 때문에 이걸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죽이고 살고 미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두려워하며 우리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사랑하며 살고,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가볍게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도 인간들이 멍청하게 사니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깨닫게 했는데, 그래도 못 깨달으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영모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늘 기억하고 있는 것 하나는 ‘인간은 있이 없고, 하나님은 없이 계신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것 같고, 우리는 눈에 보이니까 있다고 따따부따하지만, 100년 전에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100년 후에 우리가 어디에 있을 겁니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없는 겁니다. ‘있이 없고, 없이 있다.’ 얼마나 일목요연한 말씀인지요. 제대로 알면 우리가 불필요한 집착에 사로잡혀가지고 거짓 나를 나로 알고, 이렇게 살진 않을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순종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제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움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무언가 붙잡고 조작하려는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 내 조바심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밥을 지을 때 정말 밥이 될까하고 10초 간격으로 열었다 닫았다하면 밥이 되겠습니까? 도자기 가마에 불을 붙여 때는데, 가마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면 1,200도가 올라가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망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뢰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놔두면 팔팔 김이 오르고 밥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공중에 나는 새나 들의 꽃도 다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느냐, 그런데 인간이 왜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냐, 하나님은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신다고 알아듣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와 있다고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게시적인 믿음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순종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삶을 하님의 사랑의 원리, 사랑의 법칙대로 산 사람들은 특징이 있는데,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젊은 날에 사람을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출애굽에 보면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온유하게 만드는 길은 내가 온유해지는 겁니다. 세상이 사랑의 세상이 되게 하는 길은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가 안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은 세상과 싸웠습니다. 누구나 자기 방식이 있었을 겁니다. 돈하고도 싸웠고, 일전에 TV보니까 웰빙 다이어트에 대해 나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살하고 전쟁을, 살빼기 전투를 한다고, 아니 내 살이 어떻게 해서 내 적이 됩니까? 이뻐하면서 나가라고 해도 나갈똥 말똥 하는데, 적으로 삼으니까 안나갈려고 싸우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싸움의 방식의 삶의 형태를 내려놓고 사랑의 방식으로 한번 세상을 보자, 내 자신을 보자, 하나님을 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온유라는 개념으로 어쩌면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뛰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내면의 고요함도 지킬 수 있는 바란스를 맞춰야 하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힘과 예수님의 지혜와 성령님의 사랑, 이 세 가지를 내 안에서 일치시키고자하는 그런 삶을 내가 선택하며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죠. 구체적으로 이해해야지, 맹목적으로 우리 인생을 살수 없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가 주어져 있어요.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귀한 가치있는 기회죠, 그런데 사람들은 얘기하죠, 나는 늙었으니까, 나는 여자니까, 나는 뭐니까,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요. 내 삶은 내가 가는 겁니다. 내 길을 누가 인도하는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이겁니다. 나는 어제의 나로 오늘을 살지 않겠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이병창목사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본질을 요약한 장입니다. 믿음이란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에는 또 우리들 귀에 어떻게 들리셨는지 잠깐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춤꾼님은 히브리서 기자의 믿음에 관한 말씀을 읽고 본인의 믿음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하셨는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건데 이왕 바랄 거 크게 바라야 되겠다, 아프리카에 학교가 한 개가 아니라 사십 개가 지어질 수 있도록 크게 바라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볼 때는 충분히 인정받는 거 같은데…. 기왕에 화살을 잡았으니까 토끼 잡는 것보다는 호랑이를 한번 잡아보겠다는 그런 뜻으로는 들립니다. 생각 하나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죠. 영석님은 소식이 어떻게 왔나요?
5절 뒷 부분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얼마나 흡족하게 생각하셨는지 기록되어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면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 어르신들 중에 가장 큰 어르신인 하나님께서 나를 흡족해 하실까, 살면서도 어른들이 많은데 그분들께 참 흡족하게 해드리고 또 인정받지 못하고 살지 않았나, 그래서 가슴이 찔리네요.
어른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수피 예배를 참석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 예를 들어서 세마라는 제자리서 도는 춤을 출 때 아이들도 나오고 어른들도 나오고 그러는데, 중심에 나갈 때는 어른들, 노장들한테 꼭 이렇게(가슴 높이에서 한 손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개 얹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듯) 절을 하고, 뭔가 예를 표현하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노장들의 눈빛, 그것은 정말 흡족한 표정이었던 것이 내 마음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에서 크는 사람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라는 말이 필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들어갈 때도 꼭 절을 하고, 무언의 오고가는 그 느낌들은 그 사람들의 큰 유산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셨나요?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것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를 보면서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는데, 살다보면 때로는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여기 죽음의 사람들을 쭉 열거를 하면서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과감히 믿음의 길을 갔기 때문에 죽은 이후에도 이루어진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은 진인사의 삶을 살아가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2절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를 했는데, 죽을 때 유언을 남기기를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내 유골을 가지고 가라해서 출애굽할 때 그 유골을 가지고 갔어요, 그 목적지가 어딘지 아세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천하의 명당을 찾은, 하나님께서 내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어디일까, 그 땅을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지목한 거지요. 그래서 그쪽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너무 존경하니까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땅 그 누구의 땅이건 굴이건 다 주겠다고 그렇게 제안을 했어요. 그럴 때 ‘노’ 하고 아주 비싼 돈을 많이 줬어요,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공회를 열어서 말이죠. 아브라함은 수가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빨리 대답을 해요. 내 후손들은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번성할 것을 알았죠. 그 막벨라 굴이란 곳은 시내산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포인트 지점이죠.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이고,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 유골을 가지고 출애굽을 할 때 그 쪽으로 갔다가 잡은 거지요. 요셉이나 아브라함이나 다 보면 먼 미래를 통찰한 사람이죠. 또 어떻습니까?
13절요, ‘참고향’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세상 일이 힘들거나 힘들지 않거나 행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건 참고향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요즘은 제가 기도하는 게 아기를 갖는 거예요. 예전에는 하나님이 아기를 주실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올해 기도하며 준비해보고 주시면 주시는 대로 행복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고, 안 주시면 또 다른 더 좋은 것을 주시려나 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으로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침묵 기도 - 41초 동안)
권미양님은 지금 어디를 그렇게 보고계신가 궁금해지네요. 오늘 모자가 멋있네요. 나는 모자만 보면 내가 꼭 써 보고 싶어요. 몇 절입니까?
저는 그냥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잖아요? 11장을 다 읽고 나니까 성경을 한 권 다 읽은 것 같은 그런 내용들이 쭉 나열이 돼 있는데, 믿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이 살기도 하고 아픈 사람이 낫기도 하고, 또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톱에 몸이 짤리기고 하고, 또 조소를 당하기도 돌에 맞아 죽기도 하잖아요. 이렇게 너무나 극한적으로 다르게 우리 삶에 나타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믿음의 힘으로 그걸 선택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자유....... 믿음이란 의식이예요, 우리 인간의 의식입니다. 불신도 의식이고, 믿음도 의식입니다. 의식의 신념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뜰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과학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500만전 지나면 태양이 사라질 거랍니다. 언젠가는 태양이 식어요,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날 동안에는 태양이 견뎌줄 겁니다. 그 때쯤으로 우리가 가서 ‘일간에 하여간 태양이 식을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세상이 굉장히 불안하고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살고 있잖아요? 다 믿음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다음 주 몇일 날 약속을 한다면 ‘그 날까지는 최소한 살아있을 거다, 하나님께서 불러가진 않겠지, 설마하니…’ 이런 믿음이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삶의 밑을 구성하는 의식의 체계가 이게 믿음인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 고장 난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 누군가를 믿었는데 배신을 당했다든가, 버림을 받았다든가 하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밑에는 불신이 있어요.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의식은 기본적으로 깔린 거예요.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축구로 말하면 주전 멤버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관점으로 보면 성서는 믿음의 책이라는 거죠. 믿음의 책! 히브리서도 믿음이 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여진 거죠. 이 히브리서 기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글이란 걸 보면 무식한 사람이 썼나, 조금 가방 끈이 짧은 사람이 썼나를 바로 알잖아요, 이 원문을 보면 히브리서는 굉장히 고급 문체입니다. 뭔가 한 통을 탁 한 분으로 그러니까 믿음에 대해서도 일목요연하게 성경 한 권을 읽은 거 같다는 느낌이 들게끔 이게 요약을 잘 해주고 있잖아요. 그러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테마입니다. 이 믿음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분들이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그 부분을 교리적인 차원에서 집대성을 하셨죠.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믿음으로! 에배소서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길 ‘믿음으로 인간은 의에 이르고, 그 의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표현들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 그런데 뭘 믿어? 믿는다는 건 기본인데, 뭘 믿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얘기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을 만났고 그 분을 믿었던 사람들인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거죠. 이번 생애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애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도하신다, 그걸 믿는 사람들이란 거죠. 그러니까 이생에서 가질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크게 연연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래는 우리가 알 수는 없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온 하나님이 미래엔들 같이 안 가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불안할 때, 요동칠 때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한 생애의 삶을 잘 사신 분들의 이야기를 요약할 수가 있는 거죠. 믿음의 시조가 누굽니까?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한 예스맨이죠. 사람들 앞에서는 용맹한 사람이죠. 자기 조카가 붙잡혀 갔을 때 전투를 해가지고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를 해서 전과를 올리잖아요? 전략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잖아요? 가라, 하면 가고, 멈춰라, 하면 멈추고. 바치라, 하면 바치고, 철저하게 예스, 예스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시조가 된 거죠. 그런 류의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이 히브리서 11장인 거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하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믿는 사람들하고 전혀 세상이 달라요. 제가 어려서부터 우리 앞에 계시는 어머니 덕분에 예배당을 다니게 되고, 우리 가문에서는 첫 크리스찬이십니다. 성서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는 뭐냐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죠. 그러니까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는 연장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제가 자주 쓰는 말, ‘늙은이’라는 말? ‘늘 그런 이’, 늘 그렇게 사는 이. 그래도 모세는 80세에도 이스라엘 백성으로 돌아가고, 40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했어요. 모세는 죽을 때도 고상하게 죽었어요. 지금까지의 삶을 계속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심는다, 그게 신앙이죠. 그게 믿는 이의 태돕니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이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라면 사과나무를 심는 거예요. 뻔히 알아요,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그거 사과나무 심으나마나 하니까 사람들은 안 심겠지만, 나는 심겠다는 거예요. 어제의 나로부터 큰 엑스도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성서는 뭐라고 말씀을 하고 있냐면 떠날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이 지구에서 살만큼 살다가 ‘와라’하면 ‘예’하고 가볍게 가라는 거예요. 그게 믿음을 가진 사람의 힘이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까 제가 숨 쉬는 거 심장이 뛰는 거 느껴보라고 그랬죠, 왜 자꾸 이걸 하라고 하겠어요, 내 심장이 뛰는 건 내가 뛰라고 해서 뜁니까? 내 의지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심장이 뛰는 건. 폐가 움직이는 건, 여러분, 숨 안 쉴라고 해서 안 쉬어져요? 들리는 거, 내가 안 들을라고 해서 이 소리가 안 들립니까? 이게 들리잖아요. 머리카락, 이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들이 염려한다고 해서 머리카락이 안 자라냐 이거죠, 이 세상은 다 알아서 가고 있어요. 내가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지극히 적은 거예요.
이 지구가 자전하고 또 공전하면서 태양계가 움직이고, 이 우주가 다 움직이고 있는데, 빈틈없이 가고 있는데, 정말 빈틈없이 가고 있어요,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를, 1년 동안 공전, 자전을 하면서 계절이 나오잖아요? 낮과 밤이 연출되잖아요? 이게 빈틈이 있습니까? 추호라도 빈틈이 있다면 모든 질서가 깨져버리죠. 지금은 눈발이 날리지만 아침에 칡뿌리를 깨보니까 벌써 달라 싹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또 태양과 이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한 생애를 살다가 다 한 이치로 가고 있잖아요? 이 우주의 움직임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권능이 있어, 움직이게 하는 이가 있어, 그런 삶을 내 삶 속에 받아들이고, 그 권능을 내 권능으로 삼는 거예요. 그 플러그를 꽂는 게 믿음인 거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주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힘, 그 권능을 믿는 것이 믿음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맹목적인 게 아니라 게시적인 믿음이라는 거죠, 게시적인 믿음! 성경이 얘기하는 건 게시적인 거죠. 나의 신념을 믿는 게 아니라 내 신념, 그 이상의 세계를 믿는 거죠. 원불교 대학원 수련회에 나를 두 번째 불렀을 때 이심전심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이심전심을 아느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학원생한테 이런걸 아냐고 물으시는 거냐는 표정들이에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메모리로서 안다는 것도 있고, 인간의 의식으로써 인식하는 차원에서 안다는 것도 있고, 내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성경은 게시로 안다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심전심은 초등학생도 안다고는 할 수 있어요, 사전적인 지식으로 알 수 있죠. 여러분들이 지금 이심전심이라는 이 말을 수도 없이 쓰고 있는데, 용타스님도 저기 전시해 놓은 항아리에 남긴 말이 일체유심조인데, 둘이 서로 마주보고 이심전심 말하지 말고 둘이 한번 통해 보아라고 했죠. 한참 후에 소감나누기를 했는데, 남자 눈을 처음 보았다고들 했죠.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이렇게 마주보고 눈을 깊이 들여다본 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원불교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여성의 시대가 올 거다는 것, 원불교의 힘은 여성들에게 있습니다, 그걸 시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그게 창시자의 믿음이죠.
자, 그러면 이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든 차원에서 물리적 차원이건, 우주적 차원이건, 인간의 심성이건, 영성이건, 모든 차원에서 쉬지 않고 선을 향해 움직여가는 어떤 힘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힘이다 이겁니다. 그 힘을 자각하는 것을 게시라고 합니다. 이 게시의 의미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해요. 내 인식의 한계를 얼마든지 무궁무진하게 뛰어넘는 차원이 있다는 거죠. 우리 눈은 아주 지극히 좁은 거라고 말했죠. 그런 세계를 아는 사람들은 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을 조절하려고 헛심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살자는 거죠. 예를 들어 여기 냇가에 가면 검정 쇳가루가 있어요, 그걸 손가락으로 집어서 올리려고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자석을 갖다 대면 어때요? 원리죠. 단 한번에 모래밭을 휘적거리면 자석에 다 붙잖아요? 그러한 이치를 .........그게 게시적 차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에요. 예를 들어 자동차가 고장이 났어요, 실력도 없는데 자꾸 뒤적거리면 어때요? 더 큰 고장을 만들 뿐이잖아요? 아프리카에서 카바넷 가다가 차가 고장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다 서요, 서는 건 좋은데 다 드라이버 가지고 와서 고친다고 하지만 성의와 마음은 좋아요, 그런다고 차가 갑니까? 그래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런 지혜를 얻는 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무엇이 나를 파괴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이걸 깨닫고 이해하는 가운데서 믿음의 내용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게시적 차원의 앎에 이르는 믿음!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어려서 부흥회에 가보면 아, 믿음을 뜨겁게, 믿음을 강하게 가져야한다고 해요. 도대체 믿음을 뜨겁게 가지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않죠.
이 자연계에는 많은 법칙들이 있어요. 열역학의 법칙도 있고, 만유인력의 법칙, 음양오행, 또 햇빛이 비치면 식물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고, 바다에서 플랑크톤이 광합성 작용을 해서 산소를 내뿜으면 우리 지구인들이 이걸 먹고 살아요. 이 산에 있는 나무들 덕에 우리가 산소를 먹고 산단 말이죠. 그런데 그 이치를 안다면 나무를 파괴하고, 바다를 오염시키고, 아 그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하고 이렇게 알잖아요. 파괴하는 일을 모르고 했다면 이제는 아니까 않는 거예요. 믿음도 그런 거지요. 믿음도 이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에크하르트라는 분이 신념의 믿음에서 빨리 깨달음의 믿음으로, 이해하는 믿음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법칙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의 법칙이 뭐냐면 사랑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노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과일나무를 잘 보아라, 어떤 나무도 자기가 먹으려고 열매를 맺고 사는 나무는 없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것은 不自生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오래가는 거다. 나무도 이렇게 가고 있는데, 왜 인간들은 나의 이익을 위한다고 남을 해치고, 이런 일을 할까? 不自生의 도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생명의 법칙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성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의 법칙은 발명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겁니다. 내가 신념을 강하게 가지면 열역학의 법칙이 어떻게 변합니까? 그런 게 아니죠, 법칙은 그냥 법칙일 뿐이죠. 사랑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문제는 곧 지성의 문제인 겁니다. 인간이 지성이 없어 어리석기 때문에 이걸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죽이고 살고 미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두려워하며 우리 인생을 살아야 됩니까? 사랑하며 살고,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자유롭게 살고, 가볍게 살아야 될 게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도 인간들이 멍청하게 사니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깨닫게 했는데, 그래도 못 깨달으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영모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늘 기억하고 있는 것 하나는 ‘인간은 있이 없고, 하나님은 없이 계신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것 같고, 우리는 눈에 보이니까 있다고 따따부따하지만, 100년 전에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100년 후에 우리가 어디에 있을 겁니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없는 겁니다. ‘있이 없고, 없이 있다.’ 얼마나 일목요연한 말씀인지요. 제대로 알면 우리가 불필요한 집착에 사로잡혀가지고 거짓 나를 나로 알고, 이렇게 살진 않을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 순종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제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움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무언가 붙잡고 조작하려는 행위를 멈추는 것입니다. 내 조바심과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밥을 지을 때 정말 밥이 될까하고 10초 간격으로 열었다 닫았다하면 밥이 되겠습니까? 도자기 가마에 불을 붙여 때는데, 가마 문을 열었다 닫았다하면 1,200도가 올라가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망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뢰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놔두면 팔팔 김이 오르고 밥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공중에 나는 새나 들의 꽃도 다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느냐, 그런데 인간이 왜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냐, 하나님은 머리카락도 다 세고 계신다고 알아듣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와 있다고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게시적인 믿음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순종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삶을 하님의 사랑의 원리, 사랑의 법칙대로 산 사람들은 특징이 있는데,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젊은 날에 사람을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출애굽에 보면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온유하게 만드는 길은 내가 온유해지는 겁니다. 세상이 사랑의 세상이 되게 하는 길은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가 안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은 세상과 싸웠습니다. 누구나 자기 방식이 있었을 겁니다. 돈하고도 싸웠고, 일전에 TV보니까 웰빙 다이어트에 대해 나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살하고 전쟁을, 살빼기 전투를 한다고, 아니 내 살이 어떻게 해서 내 적이 됩니까? 이뻐하면서 나가라고 해도 나갈똥 말똥 하는데, 적으로 삼으니까 안나갈려고 싸우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싸움의 방식의 삶의 형태를 내려놓고 사랑의 방식으로 한번 세상을 보자, 내 자신을 보자, 하나님을 보자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온유라는 개념으로 어쩌면 우리 안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도 봅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뛰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내면의 고요함도 지킬 수 있는 바란스를 맞춰야 하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힘과 예수님의 지혜와 성령님의 사랑, 이 세 가지를 내 안에서 일치시키고자하는 그런 삶을 내가 선택하며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죠. 구체적으로 이해해야지, 맹목적으로 우리 인생을 살수 없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가 주어져 있어요.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귀한 가치있는 기회죠, 그런데 사람들은 얘기하죠, 나는 늙었으니까, 나는 여자니까, 나는 뭐니까,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요. 내 삶은 내가 가는 겁니다. 내 길을 누가 인도하는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이겁니다. 나는 어제의 나로 오늘을 살지 않겠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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