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490139
  • Today : 1536
  • Yesterday : 1063


권능에서 무능으로 들어서는 길

2015.10.04 09:05

물님 조회 수:6708


권능에서 무능으로 들어서는 길 - 십자가와 부활 예고

          

       마가복음 8: 31-32. 9:30-32. 10: 32-34



마가복음은 8장 26절까지의 갈릴리 사역, 8장 27절부터 10장 까지의 수난에 대한 세 차례 예고와 그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 관한 보고, 그리고 11장부터 전개되는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과 부활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본문은 이부의 시작 부분( 8:27- 9: )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이 평행선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과 내가 예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용이 얼마나 판이하게 다를 수 있는 가를 파악해야만 한다.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는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이 천년 전 제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본문을 읽어내야 한다.


마가는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 첫째로 신앙고백의 주제를 먼저 다루고 있다. 예수는 베드로처럼 내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명을 가지고 인간 해방의 사역을 권능 있게 하셨다. 인간은 모두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의 존재로 살아야 함을 가르치신 예수의 복음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을 올바로 깨닫는 이해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능력이 넘치는 분이 악마의 세력에 넘겨져 죽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뱀에게 잡아 먹혀 뱀을 잡는 두꺼비처럼 죽음을 통해 악마의 힘을 소멸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거듭거듭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수난의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난 권능, 로마와 위정자들에게 수탈당하는 이 세상을 바로 잡아줄 분이라고 확신하는 예수의 능력이 처절하고 허무한 무능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에 등장하는 바처럼 많은 고난을 대신하고 죽어야할 인간의 무거운 짐을 송두리째 짊어지고 죽음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속죄 제물처럼 인류의 제단에 바쳐질 제물이 되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제자들의 뜻이 충돌하게 된다. 이 충돌의 연장선상에 우리 또한 벗어날 수 없다. 베드로처럼 입으로는 그리스도이시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악마의 뜻을 따르는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


인간을 사랑하고 치유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음에도 예수는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존재들이다. 요즘으로 하면 교회의 장로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스승과 지도자로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비판적 논쟁자로 등장하고는 있지만 예수를 죽이려고 까지는 하지 않은 것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세 부류들은 작당하여 예수를 처절하게 멸시하고 십자가까지 이르게 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엎어치기 한 판과 같은 신비가 있다. 사람이 버린 곳에 하나님의 거두심이 있다는 반전이 있다. (이사야 53:1-12 참조)


마가복음 9장 31 절에 등장하는 두 번 째 예고에 이런 말씀이 있다

“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던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그로 인해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는 예언이다.


세 번 째 예고는 예수의 십자가를 행진의 분위기와 예수의 결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 그 때 예수 께서 앞장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놀라다. 무서워하다)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9:32)


제자들은 왜 세 번 째 예고에 이르러서야, 무엇에 놀라고 무서워했을까? 그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수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데 따른 무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비장한 선언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 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로마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 10:33-34)


사람을 조롱하고 얼굴에 침 밷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잇는 가장 모욕적 행위일 것이다. 만약 그런 처우를 누군가로부터 당했다면 얼마나 그 상처가 깊을 것인가. 거기에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질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세 번의 수난 예고에서 그 때마다 보여주는 제자들의 반응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첫 번 예고에서 베드로는 스승을 향해 책망을 하고 예수의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베드로의 반응에 대한 예수의 반응 역시 예사롭지 않다. ‘호통치다. 책망하다, 모욕하다, 욕하다’의 뜻을 지닌 '에페테만(epitiman)'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배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부르고 물러가라고 책망했다. (8:33)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예수를 따르려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중요한 말씀을 주셨다. 내가 만들어 낸 예수상을 부수고, 자기의 의와 에고를 내려놓은 사람만이 예수를 온전히 따를 수 있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그 고백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서의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두 번 째 예고 후에는 자기네 들 가운데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를 놓고 제자들은 서로 다투었다. 그길이 어떤 길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를 향해 예수는 가시는 데 제자들은 철없이 누가 높은가를 다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서열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봉사요 헌신이요 감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특히 고아와 가난한 자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해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가 욕먹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교회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자원을 독식하려 할 때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교회로서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햇빛과 같아서 온 천지에 뿌려지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선악을 가르고 교회 안과 밖 사이에 철조망을 치고 있는가.


세 번째 예고 후에도 제자들의 태도는 달라진 것이 없다. 세베대오의 두 아들은 여전히 자리싸움을 하고 있다. 높은 사람 되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은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 하나이다. 정치인들에 관 한 뉴스는 이런 인간들의 치열한 활약상을 날마다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이와 반대의 길이다. 여기에 우리의 영적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그리고 영생의 길에서 참으로 웃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타인을 향해서는 무한한 권능을 행사하시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무능하신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 부자생(不自生)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버림 받은 어린아이를 안으셨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품어 안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제는 예수를 품어 안아야 할 때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버림 받고 실패의 길을 가신 분이었음을 상기하자. 성공과 경쟁의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길을 가신 분이었음을 생각하자.

2015. 9 추석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