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5월 9일 진달래 독서모임
2016.05.10 09:38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물 이 병 창
한 작품 속에는 알게 모르게 저자의 삶과 사상이 녹아 있기 마련이다. 작품 속의 주인공을 창조하는 것도 작가의 몫인 만큼 작품 속의 인물과 저자 사이에도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 ‘다섯째 아이’라는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은 작품해설 가운데 “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가족에 대한 가치관이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라는 문구 때문이기도 하다.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평론가의 해설이라고 하는 것이 평론가의 개인적 관점이 주도적으로 반영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긍정해야만 하는 답처럼 여겨지는 것은 독자들의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가족이데올로기가 허상이라면,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그 논리도 역시 허상일 수 있다는 통찰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고양이를 호랑이로 표현하는 해설자의 과장법을 걷어내고 책속으로 진솔하게 들어서는 노력이 특별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섯의 수비학적 의미
수비학에서 4까지는 물질 또는 땅의 숫자라고 말한다. 4지에 머리가 얹어져야 인간의 몸이 될 수 있다. . 다섯 손가락과 오장을 가진 인간은 5감을 가지고 물질을 통합하는 존재이다. 5라는 숫자의 특성은 어떤 숫자에 5를 곱하면 0 아니면 5로 끝나게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5는 기존의 질서를 깨뜨려서 0으로 회귀시키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나가고자하는 변화와 해방의 추구이다.
5는 모든 숫자의 중심이다. 그래서 모든 숫자에 영향력을 준다. 5는 호기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각의 틀을 넘어다 본다. 만약 그 호기심을 억압한다면 저항과 투쟁이 발생한다. 자존심과 자립심의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다. 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 조차 무심한 다섯 째 아이는 기존의 평화로운 질서를 깨트려 다시 생성하게 하는 에너지를 상징해 주고 있다. 저자의 삶을 들여다 보면 그녀 역시 5의 에너지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영국인이지만 이란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성장했다. 외국에서 태어나 외롭게 황막한 자연을 관조하면서 살았던 그의 삶은 반체제적이고 아웃사이더적인 의식을 형성한 것 같다. 그가 결혼 한 이후 공산주의자가 되고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한 것은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을 그녀가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 가족주의를 거부한다. 그것은 가족보다는 공동체의 선이 우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는 인간에 대하여 ‘재화를 생산해 내는 도구’라고 말한다. 인간을 사랑과 깊은 영적 친밀감의 소통이 가능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서슴지 않고 가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제도권을 거부해온 그녀의 삶과 성격적 기질도 있겠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이 깊은 소통이 되지 않는 데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혼한 이유에 대해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족보다도 우선적 가치로 여겼다면 그녀의 가족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자녀들의 양육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은 저자 한 사람의 삶이 한 시대를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중 받지 못하는 세상의 맨 얼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산주의자로서 이십여 년 동안 정치적 사찰의 대상으로 고통 받았다는 것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또 다른 한 축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기루 - 화려한 집과 자기 과시의 파티
이 시대에 결혼과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많이 달라져있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성장과 사회적 환경 변화의 산물일 것이다. 사회시스템을 유지하는 가치관의 붕괴는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한다. 그것은 전통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충돌이다. 벤이라는 이름의 다섯째 아이는 이 모든 비정상적 조건들의 상징이다. 누구나 행복과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다. 그렇게 적당하게 원하고 자기가 컷트라인을 정한 선에서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행복의 허구를 다섯째 아이는 들추어내고 뒤집고 있다.
부자가 되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사회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세뇌시키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큰 집과 그 집을 과시하고자 벌이는 화려한 파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해리엇과 데이빗 부부)은 자신의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불행은 분수에 넘치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자고로 현인들은 이를 경계해왔다.
큰 집을 한자로 옥(屋)이라 하고 작은 집을 사(舍)라 한다. 옥자는 글자 위에 주검 시(尸)가 있고 그 아래 이를지 자가 있다. 옥은 주검에 이르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자는 사람 人 밑에 길할 길(吉)자가 있다. 보다 큰집에 살기 위해 온 목숨을 다 바쳐 살아가도록 재촉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그렇게 살면 인간성이 마비되고 삶이 죽게 되어있다.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가족 문화는 설자리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현실이 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분수에 넘치지만 빅토리아풍의 집에 살면서 안정된 중산층 수입을 보장받고 있고, 문제없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는 해리엇과 데이빗 부부는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인 벤은 모성애와 책임감, 전통적인 가치를 믿어온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애물단지이다. 그들이 계획했던 이상적인 삶의 행로를 모두 파괴하는 벤은 그 부부의 모든 밑바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만다. 벤은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없는 아이일 뿐이다. 다섯째 아이 벤은 행복하게 살려하고, 살고 있다고 자부해온 부부에게는 재앙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 상대를 독점하려고 하거나 집착하는 사람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미 접어들었다. 이혼률이 높아지고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경제적 토대의 붕괴는 언제라도 다섯째 아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게 한다. 실제로 기형아의 출산이나 자페등의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의 출현은 가족관계에서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수명연장으로 인한 초 고령사회로의 진입은 직업과 일이 분리되고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는 남녀 관계가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우리사회 역시 가족 해체라는 과도기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는 한 어떤 형태의 가족관계라도 존재하기 마련일 것이다. 사회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이 격변처럼 있다하더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한 가족 자체의 관계는 없어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가 사랑이 통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동반자를 만나고자하는 욕구가 멈추지 않는 한 보다 진화되고 세련된 형태의 가족관계가 어느 한쪽에서 출현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혈연관계의 가족을 초월해서 이념과 사상도 뛰어넘는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적 가족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 단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성숙한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연약한 자, 소외된 자들을 품어주는 사랑이 있을 때 이 시대의 벤들이 새로운 숨을 쉬는 진정한 행복의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말미는 이런 문장으로 끝나고 있다.
“거기서 군중으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그 도깨비 같은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거나 군중 속에서 자기와 같은 종족에 속하는 또 다른 얼굴을 찾고 있는 벤의 모습을 볼 것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521 | 네스토리안(경교)의 영성 | 물님 | 2016.06.02 | 11418 |
» |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5월 9일 진달래 독서모임 [1] | 물님 | 2016.05.10 | 11478 |
519 | 장애? | 지혜 | 2016.04.14 | 11227 |
518 | 봄날 | 지혜 | 2016.04.14 | 11209 |
517 | 기품이란 | 물님 | 2016.04.13 | 11276 |
516 | 형광등이 LED램프에게 [1] | 지혜 | 2016.04.04 | 11180 |
515 | 해우소 [1] | 지혜 | 2016.04.02 | 11276 |
514 | 때 [1] | 지혜 | 2016.03.31 | 11269 |
513 | 내 수저 [1] | 지혜 | 2016.03.22 | 11253 |
512 | 중 이와 중 삼의 차이 | 물님 | 2016.03.20 | 11168 |
보다 큰집에 살기 위해 온 목숨을 다 바쳐 살아가도록 재촉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 존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시와 인정을 위한 삶의 단면이 비단 집에만 한정된 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조화를 극복할 힘도 다름아닌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
역시 사랑이 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