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2007.06.04 22:06
<2007년3월25일 주일설교>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요한복음 5장
이병창 목사
요한복음 5장 말씀이 오늘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에 어떻게 들려 주시는지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6절 말씀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정말 치유해 보려는, 정말 낫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깊이 나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정말 낫기를 원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서 망설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동문서답하고 있어요. “예”하면 끝나는 건데, 내가 낫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와 탓을 말하고 있어요. 나보다 빨리 들어가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병을 낫지 못하고 있고, 나를 옮겨서 던져주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에 나는 낫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가 있어요. 단순명료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삶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38년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사람의 눈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 병자의 말 한마디 속에 애매모호함이 다 들어 있어요. 또 어떻습니까?
24절 ‘내가 특히 강조해 둔다.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성경 어느 구절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앞에 놓고, 이 어린 아이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해 주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한테 해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저도 24절 말씀이 마음을 울리는데요. ‘내가 특히 강조해 둔다.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 말씀이 울림이 오면서 이미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얼마나 내 자신이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영원한 생명을 이미 주셨는데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걸 내 자신이 얼마나 인지하고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잠깐 올라왔습니다.
에고의 차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살고 있는데, 그 두려움에서 사랑의 차원으로 옮겨진 사람은 심판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와 있는 겁니다.
저는 14절과 25절이 같은 맥락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으로 고생할 것이다’와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에서 과거가 아닌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걸 알고 살아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마음의 심한 병으로 고민을 하지 않는가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에고를 딱 떨쳐버릴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침구를 떨쳐버리고 걸어 가라!
나름대로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라고 그랬는데, 남이 아니고 내가해야 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 올라오는 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2절 말씀, ‘예루살렘 가까이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행각 다섯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장소가 주변에 여러 가지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서 맹신의 장소, 치유 받으려는 기복의 장소로 느껴지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지금이 아닌 다른 순간들을 생각하고 기다리고 지금보다는 어떤 다른 순간들을 기다리고, 찾으려고 하는 장소, 모임, 기회가 지금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볼 수 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25절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때가 오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내 음성을 듣게 될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므로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지금’ 바로 ‘때’,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사람의 집, 하나님은 어디 사실까요? 어디가 하나님의 집일까요?
고린도서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했으니까 우리 몸이 아닐까요?
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이다, 또 어디일까?
도훈이, 도훈이가 손 들었어요.
천국!
내가 있는 곳, 내가 보는 사람, 내가 아들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게 아닐까요?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어디 사시냐면 영원 속에 사십니다. 사람은 시간의 집에 살고 있어요, 그러나 존재의 집은 이 지구상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입니다. 때가 되면 이 육체는 다 사라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영원과 사람의 시간이 만날 때, 어디서 만나느냐면 지금 만날 때 이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영원과 접촉점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의 과거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무얼 이루었다고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나의 미래로도 만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때’라고 하는 것, 시간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연월일을 나타내는 시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입니다. 시간의 차원에서 우리 인간이 보통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이 크로노스의 시간의 차원에서는 하나님과 접촉점을 이룰 수 없습니다. 38년 동안 ‘나는 환자야.’하고 어쩌다 한번 솟아오르는 간헐천, 노천에 맨 먼저 뛰어들면 낫는다더라하는 소문 듣고 와서 38년을 뭉개고 앉아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은 겁니다. 그 시간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38년이라는 시간은 그 사람의 무덤입니다. 그 사람은 시간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때라는 것은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시간,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시간, 내 삶의 도약이 일어나는 시간, 수평적인 삶에서 수직으로 팍 솟아오르는 시간, 영원과 부딪혀 불꽃이 튀는 시간,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지금이라는 겁니다. 38년 이라고 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끝이 나고 카이로스의 시간이 딱 임했습니다. 삶에 도약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는 삶을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하느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강점은 지금 이 순간을 나에게 허락하신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에게 숨을 주시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 수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콧구멍에만 숨을 주시는 줄 알았지만, 어느 날 호흡 수련을 하다 보면 ‘그 아담이 바로 나였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에서 오는 것인데, 이 호흡은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숨을 쉬는 것이라면 천년 만년 계속 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때가 되면 다 끝납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잘 챙기고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관념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지식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카이로스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첫사랑에 실패해서 40대 노처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삶이 없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죽여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38년 누워있는 사람이 살아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라는 말은 과거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가 문제가 아니고 지금부터가 중요한 게 아닌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우리가 얻을 때 삶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축복으로 다가오고 감사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에니어그램 공부를 해서 알지만, 가슴에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로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가 있습니다. 그 때 이랬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하나의 경험을 통해서 그 경험이 주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분이 있습니다. 카트만두에서 안나푸르나를 가는데 버스를 12시간 정도 탑니다. 중간 지점 식당에서 수저도 없이 접시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손으로 마구 집어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뒷꼭지를 누가 보고 있는 듯 자꾸 간지러워서 뒤돌아봤더니 일감 스님하고 저분 서방님이 있어요. 그분은 명리학 자미두수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공부하는 명리학을 공부해 왔다면 그 공부를 통해서 무얼 얻었는가를 물었더니, 인생의 모든 순간에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좋고 나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 이 분은 진짜구나!
나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집트의 총리를 했던 요셉에 대한 성서의 말씀을 보면 여기 저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형통한 사람이었다’ 고 합니다. 그가 형통한 사람이었다는데, 노예로 팔려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시련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가 감옥살이하고 있을 때,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외국인으로서 그 당시 강대국의 총리를 할 수 있을 만큼 지혜를 얻기까지는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저렇게 억울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꼴이 저런 거야?’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이고, 미래로 도망가면서 지금을 살지 못합니다. 지금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38년 된 병자처럼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나고 영혼이 성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남하고 비교하지 않으며 자만에 빠지거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은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인도하는 순간순간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과 나의 ‘시간’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살기 때문에 자책을 하며 삽니다. 에니어그램은 어떠한 자책도 영혼의 바이러스다고 말합니다. 자책하고 참회한다는 사람들은 굉장히 양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양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책하다가 망했지만 베드로는 즉각 회개해서 고치 짓고 나비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다 드리고 열심히 사는 겁니다. 지금 내가 생명의 세계에 있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 있는데, 38년 동안 계속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뒤에 천당 갑니까?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성서는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늘 새롭게 새롭게 이끌어가시는 분입니다. 생명은 정지되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언은 순간순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간 순간 나를 해방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여러분들은 선택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으셨다는 말을 어렸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피로 씻었다니…. 과거에 사로잡힌 내 모든 삶, 미래에 사로잡힌 내 모든 삶을 씻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도약하도록 우리를 촉구하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못 받아드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각자 어떤 두려움에 시달리고 살아왔나를 짧은 시간이지만 찾아봤습니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즉 이 육체를 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권에서는 상승과 하강이 있습니다. 자기가 판단할 때 어둠과 밝음,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그 세계에서는 시간의 윤택이 아니라, 거룩한 현재 속에서 늘 깨어나는 지금이기 때문에 어둠이니 밝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복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모독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 분 때문에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개라면 자식도 개이겠지만, 내 아버지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겠지요. 우리는 신성의 존재입니다. 육체로 태어나서 육체로 살다가 육체로 죽는다는 것은 지하실에서 태어나서 지하실에서 살다가 지하실에서 죽는 거와 같다는 구르지예프의 말이 있습니다. 이 지상의 밝은 삶을 찾아야 합니다. 땅 속에 묻힌 씨 한 톨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싹도 틔우고 열매도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도 주고, 그림자도 만들어서 나그네가 쉬어가게 하는 큰 나무 같은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나는 노란색을 싫어하는데 저건 노란색이네? 이렇게 선입견으로만 말했던 사람이 어느 날 노랑꽃 한 송이를 참 아름다게 보는 눈이 떠졌다면, 눈이 바꿔진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우리는 이 지구에 경험하러 왔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부형이십니다. 이 지구학교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이 지구학교는 시간 차원에 있는 학교라서 시간 속에서 경험하다가 떠날 겁니다.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이 세계가 환상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에고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꿈이고 환상입니다. 나그네처럼 살다가 가는 존재인데 천년 사는 것처럼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 이게 아니면 안되는데 하고 사는 생각 밑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의 세계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의 세계로 가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내 무덤은 바로 내 육체입니다. 이 몸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 몸에서 깨어날 때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걸 압니다. 탓하고 원망하고 살았던 내가 감사가 매 순간 솟아난다면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겁니다. 시체가 일어서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각과 감촉, 영혼이 깨어나서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경험해가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최면에 걸려있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이 환자처럼 무슨 핑계를 대고 있는지 살펴 보십시오. 정말 이 사람이 환자입니까? 이런 식으로 백살까지 살면서 장수무대 나가면 뭐합니까? 나에게 무엇인가 있어야만 행복하고, 그 사람이 이렇게 고쳐져야만 내가 행복합니까? 어떤 사람이 등기부등본에 있는 평수가 내 것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하늘의 별들도 내 것이고, 햇빛도, 이 돌들도, 만물이 소생하는 것도 모두가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사람은 진정 부활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네가 먼저 바꾸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밖을 보세요. 어제 비오고나더니 새순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구 보이니까 '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을 몇 번 유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람을 또 다른 감옥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나 시간의 차원에서 길들여진, 에고의 차원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어차피 육체가 감옥이니까 육에 속한 사람의 아홉 가지 특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나면 어떻게 몇 번 유형이겠습니까?
예기치 않은 특송까지 해 주셔서 감사가 넘치고 흡족한 마음입니다. 이 기쁨과 은혜로움이 한 주간 동안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기운이 모아져서 삶을 불살라가고 김만진님의 하시는 일 이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시간의 마야에서 깨어나서 오늘 여기 지금을 사는 우리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점심 메뉴에 민들레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한 분도 가지 마시고 맛있게 드시고 봄처럼 향기롭게 한 주간을 사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발견하십시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지체가 자유로움에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생명의 기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하나님의 뜻과 주변의 뜻에 공명하며 사는 한 주가 되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시간과 영원에 대하여
요한복음 5장
이병창 목사
요한복음 5장 말씀이 오늘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에 어떻게 들려 주시는지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6절 말씀에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는데, 정말 치유해 보려는, 정말 낫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깊이 나를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정말 낫기를 원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서 망설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해서 동문서답하고 있어요. “예”하면 끝나는 건데, 내가 낫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와 탓을 말하고 있어요. 나보다 빨리 들어가는 인간이 있기 때문에 병을 낫지 못하고 있고, 나를 옮겨서 던져주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에 나는 낫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가 있어요. 단순명료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삶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38년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은 사람의 눈을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 병자의 말 한마디 속에 애매모호함이 다 들어 있어요. 또 어떻습니까?
24절 ‘내가 특히 강조해 둔다.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성경 어느 구절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앞에 놓고, 이 어린 아이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해 주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한테 해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저도 24절 말씀이 마음을 울리는데요. ‘내가 특히 강조해 둔다. 누구든지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 말씀이 울림이 오면서 이미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얼마나 내 자신이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살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영원한 생명을 이미 주셨는데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걸 내 자신이 얼마나 인지하고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잠깐 올라왔습니다.
에고의 차원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살고 있는데, 그 두려움에서 사랑의 차원으로 옮겨진 사람은 심판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와 있는 겁니다.
저는 14절과 25절이 같은 맥락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으로 고생할 것이다’와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에서 과거가 아닌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걸 알고 살아야 하는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마음의 심한 병으로 고민을 하지 않는가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에고를 딱 떨쳐버릴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침구를 떨쳐버리고 걸어 가라!
나름대로 누군가가 해 주기를 바라고 그랬는데, 남이 아니고 내가해야 된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 올라오는 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2절 말씀, ‘예루살렘 가까이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행각 다섯이 세워져 있었다. 이 장소가 주변에 여러 가지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서 맹신의 장소, 치유 받으려는 기복의 장소로 느껴지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지금이 아닌 다른 순간들을 생각하고 기다리고 지금보다는 어떤 다른 순간들을 기다리고, 찾으려고 하는 장소, 모임, 기회가 지금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볼 수 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25절 함께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때가 오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내 음성을 듣게 될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므로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지금’ 바로 ‘때’,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사람의 집, 하나님은 어디 사실까요? 어디가 하나님의 집일까요?
고린도서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했으니까 우리 몸이 아닐까요?
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이다, 또 어디일까?
도훈이, 도훈이가 손 들었어요.
천국!
내가 있는 곳, 내가 보는 사람, 내가 아들을 보면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게 아닐까요?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어디 사시냐면 영원 속에 사십니다. 사람은 시간의 집에 살고 있어요, 그러나 존재의 집은 이 지구상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입니다. 때가 되면 이 육체는 다 사라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영원과 사람의 시간이 만날 때, 어디서 만나느냐면 지금 만날 때 이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영원과 접촉점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의 과거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무얼 이루었다고 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나의 미래로도 만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때’라고 하는 것, 시간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연월일을 나타내는 시간,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입니다. 시간의 차원에서 우리 인간이 보통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이 크로노스의 시간의 차원에서는 하나님과 접촉점을 이룰 수 없습니다. 38년 동안 ‘나는 환자야.’하고 어쩌다 한번 솟아오르는 간헐천, 노천에 맨 먼저 뛰어들면 낫는다더라하는 소문 듣고 와서 38년을 뭉개고 앉아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은 겁니다. 그 시간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38년이라는 시간은 그 사람의 무덤입니다. 그 사람은 시간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때라는 것은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시간,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시간, 내 삶의 도약이 일어나는 시간, 수평적인 삶에서 수직으로 팍 솟아오르는 시간, 영원과 부딪혀 불꽃이 튀는 시간,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지금이라는 겁니다. 38년 이라고 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끝이 나고 카이로스의 시간이 딱 임했습니다. 삶에 도약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는 삶을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하느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강점은 지금 이 순간을 나에게 허락하신다는 것,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나에게 숨을 주시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 수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콧구멍에만 숨을 주시는 줄 알았지만, 어느 날 호흡 수련을 하다 보면 ‘그 아담이 바로 나였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에서 오는 것인데, 이 호흡은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숨을 쉬는 것이라면 천년 만년 계속 쉴 수 있겠지만, 우리는 때가 되면 다 끝납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끝,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잘 챙기고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관념적으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지식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카이로스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첫사랑에 실패해서 40대 노처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삶이 없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죽여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38년 누워있는 사람이 살아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라는 말은 과거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가 문제가 아니고 지금부터가 중요한 게 아닌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우리가 얻을 때 삶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축복으로 다가오고 감사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에니어그램 공부를 해서 알지만, 가슴에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은 주로 과거로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가 있습니다. 그 때 이랬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하나의 경험을 통해서 그 경험이 주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분이 있습니다. 카트만두에서 안나푸르나를 가는데 버스를 12시간 정도 탑니다. 중간 지점 식당에서 수저도 없이 접시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손으로 마구 집어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뒷꼭지를 누가 보고 있는 듯 자꾸 간지러워서 뒤돌아봤더니 일감 스님하고 저분 서방님이 있어요. 그분은 명리학 자미두수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공부하는 명리학을 공부해 왔다면 그 공부를 통해서 무얼 얻었는가를 물었더니, 인생의 모든 순간에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좋고 나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아, 이 분은 진짜구나!
나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집트의 총리를 했던 요셉에 대한 성서의 말씀을 보면 여기 저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형통한 사람이었다’ 고 합니다. 그가 형통한 사람이었다는데, 노예로 팔려다니고, 감옥에 갇히고, 온갖 시련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가 감옥살이하고 있을 때, 그를 형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외국인으로서 그 당시 강대국의 총리를 할 수 있을 만큼 지혜를 얻기까지는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저렇게 억울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꼴이 저런 거야?’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이고, 미래로 도망가면서 지금을 살지 못합니다. 지금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38년 된 병자처럼 그 모양 그 꼴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깨어나고 영혼이 성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남하고 비교하지 않으며 자만에 빠지거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은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인도하는 순간순간의 기회를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원’과 나의 ‘시간’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살기 때문에 자책을 하며 삽니다. 에니어그램은 어떠한 자책도 영혼의 바이러스다고 말합니다. 자책하고 참회한다는 사람들은 굉장히 양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양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책하다가 망했지만 베드로는 즉각 회개해서 고치 짓고 나비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다 드리고 열심히 사는 겁니다. 지금 내가 생명의 세계에 있지 않고 죽음의 세계에 있는데, 38년 동안 계속 이렇게 살다가 어떻게 죽은 뒤에 천당 갑니까?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성서는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 새로운 피조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늘 새롭게 새롭게 이끌어가시는 분입니다. 생명은 정지되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언은 순간순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간 순간 나를 해방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여러분들은 선택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씻으셨다는 말을 어렸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피로 씻었다니…. 과거에 사로잡힌 내 모든 삶, 미래에 사로잡힌 내 모든 삶을 씻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은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도약하도록 우리를 촉구하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못 받아드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각자 어떤 두려움에 시달리고 살아왔나를 짧은 시간이지만 찾아봤습니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즉 이 육체를 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권에서는 상승과 하강이 있습니다. 자기가 판단할 때 어둠과 밝음,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그 세계에서는 시간의 윤택이 아니라, 거룩한 현재 속에서 늘 깨어나는 지금이기 때문에 어둠이니 밝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복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모독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 분 때문에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개라면 자식도 개이겠지만, 내 아버지가 정말 하나님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겠지요. 우리는 신성의 존재입니다. 육체로 태어나서 육체로 살다가 육체로 죽는다는 것은 지하실에서 태어나서 지하실에서 살다가 지하실에서 죽는 거와 같다는 구르지예프의 말이 있습니다. 이 지상의 밝은 삶을 찾아야 합니다. 땅 속에 묻힌 씨 한 톨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싹도 틔우고 열매도 많이 맺어서 사람들에게도 주고, 그림자도 만들어서 나그네가 쉬어가게 하는 큰 나무 같은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나는 노란색을 싫어하는데 저건 노란색이네? 이렇게 선입견으로만 말했던 사람이 어느 날 노랑꽃 한 송이를 참 아름다게 보는 눈이 떠졌다면, 눈이 바꿔진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우리는 이 지구에 경험하러 왔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학부형이십니다. 이 지구학교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이 지구학교는 시간 차원에 있는 학교라서 시간 속에서 경험하다가 떠날 겁니다.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이 세계가 환상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에고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꿈이고 환상입니다. 나그네처럼 살다가 가는 존재인데 천년 사는 것처럼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 이게 아니면 안되는데 하고 사는 생각 밑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의 세계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의 세계로 가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내 무덤은 바로 내 육체입니다. 이 몸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이 몸에서 깨어날 때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걸 압니다. 탓하고 원망하고 살았던 내가 감사가 매 순간 솟아난다면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겁니다. 시체가 일어서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각과 감촉, 영혼이 깨어나서 순간순간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경험해가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최면에 걸려있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이 환자처럼 무슨 핑계를 대고 있는지 살펴 보십시오. 정말 이 사람이 환자입니까? 이런 식으로 백살까지 살면서 장수무대 나가면 뭐합니까? 나에게 무엇인가 있어야만 행복하고, 그 사람이 이렇게 고쳐져야만 내가 행복합니까? 어떤 사람이 등기부등본에 있는 평수가 내 것인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하늘의 별들도 내 것이고, 햇빛도, 이 돌들도, 만물이 소생하는 것도 모두가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 사람은 진정 부활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네가 먼저 바꾸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밖을 보세요. 어제 비오고나더니 새순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마구 보이니까 '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을 몇 번 유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사람을 또 다른 감옥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나 시간의 차원에서 길들여진, 에고의 차원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은 어차피 육체가 감옥이니까 육에 속한 사람의 아홉 가지 특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깨어나면 어떻게 몇 번 유형이겠습니까?
예기치 않은 특송까지 해 주셔서 감사가 넘치고 흡족한 마음입니다. 이 기쁨과 은혜로움이 한 주간 동안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기운이 모아져서 삶을 불살라가고 김만진님의 하시는 일 이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시간의 마야에서 깨어나서 오늘 여기 지금을 사는 우리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점심 메뉴에 민들레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한 분도 가지 마시고 맛있게 드시고 봄처럼 향기롭게 한 주간을 사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발견하십시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지체가 자유로움에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생명의 기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하나님의 뜻과 주변의 뜻에 공명하며 사는 한 주가 되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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