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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연민의 기둥을 세우는 지혜

2010.05.30 23:46

물님 조회 수:6812

용서 - 연민의 기둥을 세우는 지혜

 

천안함 사태이후 요동치는 시국을 지켜보면서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들어갔던 고 정주영회장을 다시 생각한다. 그가 젊은 시절 카센터를 운영할 때 피땀흘려 세운 건물이 화재로 잿더미가 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직원이 용서를 빌었다. “사장님, 방치한 시너통에서 불이나 카센터가 타버렸네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 정주영은 “괜찮아, 그렇잖아도 센터 다시 지으려 했어. 철거비용 굳었으니 오늘 저녁엔 막걸리 파티나 하세”라고 말했다. 그런 넉넉한 아량과 관용이라면 한 시대를 뒤흔들 재력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주영을 그냥 회장이 아니라 왕회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기꺼이 목숨을 던져 그의 신하가 되고자했던 심복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사람들의 특징은 크게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수님도 크게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시지 않았는가. 화를 내고 징벌하는 방식은 보통 인간들이 가장 쉽게 기계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감옥에 나 자신을 가두는 방식이다. 바로 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옥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용서는 유약한 자들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눈에는 눈의 방식으로 처리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고 말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서 비난의 손가락을 향할 때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남을 가리키는 두 개의 손가락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세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혜와 용서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기 자신의 몫이다. 카발라의 지혜가 강조하는 연민의 기둥은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할 때만이 자비와 정의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치에서 나오려고 하는 나비를 재빨리 도와주는 식의 어리석은 자비, 자신의 에고에 근거한 정의의 실현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돌아보고 배움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 중심에 연민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연민의 기둥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통찰하게 하는 사례를 들어 보자.



일본의 에도시대에 임제종 승려인 반케이 선사의 동안거 수련 중에 도둑 누명을 쓴 승려가 자신의 누명을 벗겨 달라고 간청했다. 반케이 선사는 그에게 “그대는 진정 그의 돈을 훔치지 않았는가?” 라고 물었다. “예, 수행처에서 어찌 남의 돈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 “ 하지만 자금 여기에는 전국의 수많은 스님들이 모여 있어 제게 씌어진 혐의가 전국으로 퍼질 것입니다. 그러니 매우 억을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죄인이 나와야하는데 그래도 좋은가? ” 이 말을 들은 승려는 문득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여기 와서 제가 배우고자 하는 것이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 즉 대자비심을 얻는 일이었는 데 그동안 허망한 데서 찾고 있었습니다. 저 자신만을 생각한 점 진실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당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와 있는가? 에고의 나를 벗어나서 예수의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져보자는 것 아닌가. 비판과 비난의 손을 거두고 원수도 용서하는 그 길을 걸어보자는 것 아닌가.(눅 6:27이하) 그렇다면 왜 비난의 손길을 거두고 용서의 손길을 택하라고 성현들은 그렇게 강조했을까?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지수가 낮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화를 내고 두고두고 그 일을 두고 씹어대는 사람은 외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면역체계 기능이 낮아, 심혈관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용서는 인간이 행복해 지기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사람들이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원인은 용서의 문제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살다보면 너무나도 억울하게 상처 받는 경우가 많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에고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루이스 스미디스는 “용서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수혜자는 바로 용서하는 사람이다”라고 통찰하고 있다. 사실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데서 출발한다.



헬라어로 용서는 아포(묶다)루오(풀어주다)인데 미래 수동형의 단어이다. 누군가의 비판에 속상했다면 그리고 그 감정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내가 묶여 있는 것이다. 한번의 불편한 감정을 원한으로 삼고 평생 반복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내가 나를 스스로 묶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용서는 내가 나를 먼저 풀어 주는 지혜이다. 성서는 인간이 용서와 사랑의 의무는 있지만 누군가를 심판하고 정죄할 권리는 없다고 말씀한다. 마음으로 용서해야 마지막 때에 긍휼을 힘입게 된다고 말씀한다(마 18: 35)

내가 자비의 저울을 사용하면 하나님도 나에게 자비의 저울을 사용하시고 내가 심판의 저울을 사용하면 하나님도 심판의 저울로 나에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