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347247
  • Today : 842
  • Yesterday : 1071


유서 -법정

2012.02.10 06:20

물님 조회 수:1807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 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茶毘(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 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법정 스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44 섬진강의 애환과 망향 탑의 향수 [1] 물님 2016.07.24 1745
643 편견의재앙 file 하늘꽃 2013.11.21 1745
642 봄이 왔어요. [1] 요새 2010.02.16 1745
641 Guest 국산 2008.06.26 1745
640 영화 "Guzaarish" [1] 하얀나비 2013.01.11 1744
639 안나푸르나의 하늘에서 [3] 비밀 2012.05.15 1744
638 "집안일은 허드렛일? 멋진 공간을 만드는 일! [1] 요새 2010.09.09 1744
637 Guest 황보미 2007.09.24 1744
636 구도자의 노래 ---까비르 비밀 2013.10.22 1743
635 산마을2 [1] 어린왕자 2012.05.19 1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