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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간"[9.27]

2009.09.29 17:49

구인회 조회 수: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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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간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구르지예프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나는 거기가 아니라 왜 여기에 있는가?”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질문에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여기 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왜 우리를 불렀는가? 나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한다.

       “나는 명령 받았다. 고로 존재한다.”

       내 안에 하느님의 심성과 형상이 존재하는데

       예수께서 영생을 사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그게 바로 복음이다.

       심성을 자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복이다.

       진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 그 집에 있으면 그 집이 복된 집이 된다.

       베드로 사도는 그 진짜 삶을 8가지 덕목으로 요약해 주셨다.

     

       첫째가 믿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삶의 열정이 없다.

       믿음의 부재로 의심과 불안에 떠는 사람이 무슨 열정이 있겠는가?

       삶을 고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삶을 환희심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 때 믿음이 살아난다.

       어둠의 반대가 빛이 아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이다.

       하느님의 심성의 불이 밝혀질 때 어둠이 사라진다.

       믿음이 씨앗이지만 사랑은 믿음의 열매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첫째 관문이 믿음이며 이 믿음은 신성의 길을 가는 첫 계단과 같다.

       김흥호 선생님은 믿음을 믿힘이라고 말씀하셨다.

       낭구(나무)로 말하면 뿌리와 같은 게 믿음이다.

       인간은 일어서야 인간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서게 된다.

       믿음의 힘이 없는 사람들은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쓰는 거다.

       믿음은 능력을 갖게 되는 거다.

       그러나 능력 있고 힘센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가 빠지면 부질없다.

       감각이 살아나고 감성과 영성이 살아나는 베이스가 믿음이다.

       신앙의 기본은 믿음이다.

       신성의 길을 가는 것도 믿음이다.

       믿음의 없는 사람들은 영적 길을 갈 수 없다.

       실재를 실재로 볼 수 있는 눈을 잃어 버리게 된다.

       영적으로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수동적 의존적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명료하지 않는 사람들이 인생의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절제다.

       절제는 내가 나에게 자율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이 강하고 지속적이며 단호할 수 있다.

       절제할 수 있는 힘 센 사람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공손할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이런 거다.

       하느님에 대한 경건과 경외심을 바탕으로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을 공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서는 그분을 모르는 게 죄라고 한다.

       하느님을 알고 무지를 깨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봐야 한다.

     

       예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디아스포라 70인역 성서 셉투아진다는

       잠언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는 번역을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험의 시작이다.” 고 번역하고 있다.

       하느님을 만나고 그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 세계의 실재를 알게 되고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눈을 가지게 된다.

       일에 미치고 돈에 미친 사람들이 가족이 보이고 들꽃이 보이겠는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노래를 마음으로 부르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는 영성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경험하는 거다.

       문둥병처럼 감각이 죽은 사람들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중요한 건 이 세상 이 우주가 다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거다.

       헤르만헤세는 “이 숲이 하느님의 최초의 성전이었다.” 고 고백한다.

       이 세계를 실재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삶의 순간순간을 산 경험으로 본다.

       이 순간 내 마음의 평화와 맞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넘어지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일어서는 게 문제지.

       사랑은 자기 존재에 대한 체험의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사랑은 공간이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공간을 넉넉하게 허락해 주는 거다.

       나를 자유롭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다.

       사랑이란 존재의 체험을 한 사람에게 열려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하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거다.

       사랑은 물질적으로 타인에게 무엇을 주는 것 보다

       나에게서 어떤 에너지가 나오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내게서 사랑의 주파수가 나오면 만물이 기뻐한다.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해주는 진인을 고대하며 신음하고 있다.

       그게 사랑의 완성이다.

       자신을 향한 매질을 그치고 존귀한 사랑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고 인간의 완성이다.

       자기 완성은 자기 초월의 단계에서 영적인 사랑에 돌입했을 때

       사랑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지리적 공간의 탈출에서 신약의 존재의 차원으로 이행하게 된 것처럼

       자연인으로서의 삶과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은 전혀 다른 거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완성의 길, 어떤 자기 초월의 길을 갈 것인지?가

       삶의 포거스가 되어야 한다.

     

       썩어 없어질 것을 찾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을 보고

       영원의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9월 27일   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