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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2011.04.20 11:22

삼산 조회 수:3001

슬픔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서 순우곤이 한 말이다.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면 그 반대의 말 “슬픔도 극도에 이르면 기쁨이 된다”도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을 것같다. 슬픔이 극도에 이르면 가슴이 무너지는 고통일 터인데 어찌 기쁨이 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슬픔이 극도에 이르면 저절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기쁨만 말하고 기쁨만 추구하는 인생은 천박한 인생이다. 하물며 그것만을 추구하는 종교는 세상을 구원할 방주이기는 고사하고 싸구려 술집만도 못하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처절한 사랑이야기를 뜨거운 눈물로 바라보면서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 보았으면”하는 것이 여인의 마음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심지 굳은 사내의 최후를 보면서 “참 멋진 죽음이다!”고 감탄하는 것이 사내의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들은 그저 낭만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의 맘 속에 심어논 거룩한 씨앗이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철학이 있고 종교가 있고 예술이 있고 인생의 멋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기록일 뿐 역사는 승자의 몫만은 아니다. 역사는 승자와 패자 모두의 이야기다. 승자는 빙산의 일각일 뿐 수면 밑의 거대한 빙하는 패자의 몫이다. 패자의 슬픔을 보지 못하면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역사를 어찌볼까? 승자와 패자의 역사로 볼까? 그리보면 안 된다. 역사에는 승자와 패자가 구별되지 않는다. 구별하는 것은 보는 이가 구별할 뿐 역사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기록하는 이에 의해서일 뿐이다.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보는 이에 따라서 수시로 뒤바뀌는 것이 승자와 패자의 관계이다.

역사를 어찌볼까? 옳고 그름의 역사로 볼까? 그리보면 안 된다. 역사에는 옳고 그름이 구별되지 않는다. 구별하는 것은 보는이가 구별할 뿐 역사에는 옳은이도 그른이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기록하는 이에 의해서일 뿐이다.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보는 이에 따라서 수시로 뒤바뀌는 것이 옳고 그름의 관계이다.

 

성서를 어찌볼까? 어떤이는 구원의 역사로 보고, 어떤이는 해방의 역사로 보고, 어떤이는 심판의 역사로 본다. 또한 어떤이는 신에 대한 인간의 굴복과 순종의 역사로 본다. 그도 아니면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

 

나름대로 깨달은 이들이 역사를 보는 눈을 갖고 성서를 보는 눈을 갖는다. 그들의 시각이 나름대로는 옳은 시각일 수 있지만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는 신비다.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도 신비고 인생도 신비다. “기쁨도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고 할 수 있으니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슬픔이 극도에 이르면 하나님을 만난다”하니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인간은 신비 속에 살면서도 신비를 모른다. 신비를 까발리고 또 까발려서 그 안에 원리를 찾고 합리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는 못배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할 수 없고 까발릴 수 없으니 신비다. 그리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찌 신비라고 할 수 있을까? 분석하면 분석 할수록 더욱 신비하니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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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모르겠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인지 잘못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선한지 악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나도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겠으며 하물며 하나님을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무지한 나이니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다. 언재부터인지 나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좋고 나쁨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기쁨도 슬픔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짐승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슬프지 않다.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사육되는 짐승들 보다는 일순간에 살처분 당하는 짐승들이 오히려 행복한 죽음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易地思之 하여 내가 짐승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다면, 무수한 짐승들을 살처분 하면서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악어의 눈물”을 보는 것 같다.

 

일본대지진과 쓰나미으로 죽어간 수만의 생명들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별로 슬픈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구촌에서 하루에 죽는 사람이 20~30만 명이다. 그중에 3만 명 정도가 굶어 죽는 사람들이다. 죽음 중에 가장 비참한 죽음이 굶어죽는 것이다. 굶어 죽는 3만 명의 일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의 일이라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가보다.

매일 굶어죽는 3만 명을 외면한 채 지진과 쓰나미로 죽은 이들을 애도함이 내 마음에 허락되지 않는다. 가끔 다수의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매일 굶어 죽는 3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상기되며 -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그까짓것”하면서 외면하게 된다. 또한 세계 최장수국 일본에서, 늙고 병들고 추한 모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과 아직 젊고 아직 살날이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일순간에 휩쓸려 사라진 인생들의 죽음 중 어느 것이 더 비참한 죽음이고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죽음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대전 시내이기는 하지만 매우 후미진 곳에 내 처소가 있다. 어느 날 병들고 버림받은 강아지가 주변을 얼쩡거린다.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 주었더니 금새 기력을 차리고 매우 명랑해 졌다. 나를 보면 좋아서 펄펄 뛰고 재롱을 부린다. 나를 주인으로 선택한 모양이다. 내가 가는 곳은 어느 곳이던지 따라다니려고 하여 외출을 하려면 떼어 놓느라 애를 먹곤 하였다.

새 주인을 만나서인지 의기양양 해진 녀석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 큰 개에게 물려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동물병원에 데려갔더니 포기하란다. 제대로 치료하려면 수백 만원의 비용이 들것이며 그 비용을 들인다고 하더라도 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강아지가 많이 아플 것이라면서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다.

 

평소 강아지를 실내에는 들이지 않았는데 이놈이 제 발로 들어와 눕는다. 극심한 공포로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녀석에게 정성껏 약을 먹인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약을 먹인다.

 

수백만 짐승들이 살처분 당하는 것은 슬프지 않았는데, 수 만 명 사람들이 쓰나미에 쓸려간 것은 슬프지 않았는데 나를 따르던 강아지 한 마리가 큰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이 나를 몹시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