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김개남의 길을 따라 걷다. 동학 2,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의 출발점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동학은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고, 그 뒤를 증산교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종교들이 이었지만 동학이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세월이 오래 지나고 박정희가 그들의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전두환이 황토현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세웠지만, 그것은 그냥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89년 <갑오농민의 혼이여, 타올라라, 통일의 불길로>라는 주제로 황토현에서 제가 속한 단체에서 행사를 할 때 안기부 직원들이 같이 텐트를 치고 3박 4일간을 함께 하며 감시했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크게 이긴 5월 1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하고 종로 한복판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세워졌고, 모방송사에서는 <녹두꽃>이라는 대하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올해 지방방송과 <신정일의 천년의 길> 40부작을 찍으며 <전봉준의 길> <김개남의 길> <손화중의 길> 등 방송을 촬영하였습니다.
민족사의 가장 큰 사건인 동학농민혁명을 다시 금 되새기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길을 인물을 주제로 답사할 예정입니다.
총 여섯 번으로 진행될 답사, 두 번째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김개남편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 많은 참여바랍니다.
이름:김영주, 김기범 마지막 이름은 남조선을 열어젖힌다는 뜻의 김개남/ 본관 도강김씨/1853년 정읍 산외 동곡리 지금실 출생/ 1894년 섣달 동학의 수괴로 전주 서교장에서 즉결로 효수됨/황토현 황룡강 싸움의 선봉 그 당시의 직책은 총관령/ 전주화약 후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좌도를 통솔했음/ 2차봉기시 전봉준과 달리 공주로 가지 않고 청주성으로 진격했음/ 태인 산내 종송리로 숨어들어 재기를 도모하다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체포됨/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김개주가 김개남임/ 버드 비숖여사에 의하면 그의 목은 서울 서소문 밖의 세개의 나뭇가지에 걸려 개들에게 물어 뜯겼고 조선의 아이들이 고장난 회중시계를 분해하여 그의 입속에 밀어 넣는 끔찍한 광경이 일주일을 두고 계속되었다 함.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김개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봉준과 기범의 나이는 모두 마흔 살 쯤 되었다. 기범의 집안은 태인 지방에서 몇 대에 걸친 토호였던 까닭에 그 지방 사람들은 이들 집안을 ‘도강 김씨(道康 金氏)’라고 불렀다. 시풍(始豊) 또한 이들과 한 집안 사람이다. 기범의 사람됨은 음험하면서도 의지가 굳은 면이 있어 자못 무력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난이 일어났던 초기에 그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난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도강 김씨 중에 접주가 스물네 명이나 되었다. 기범은 자기 스스로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開南)‘ 두자를 써 주었다“고 말하면서, ’개남(開南)‘으로 호를 삼았다.”
그러나 훗날 김개남이 남원을 떠나 전주로 올라가자 박봉양은 곧바로 민보군을 모아 남원성을 공략했다. 11월 13일 농민군 지도자 유복만, 남응삼 등은 농민군을 이끌고 운봉을 넘어 영남으로 진격하고자 산동방 부동촌에서 민보군과 맞붙었으나 그 싸움에서 농민군 수천여명의 사상자만 내고 물러난다. 11월 28일 박봉양군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이 북문을 열고 달아나자 성에 입성한 박봉양은 수백명을 베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원 운봉면 서천리 선두숲에는 박봉양이 농민군을 격퇴한 것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남원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했던 김개남의 흔적은 백년의 세월동안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그 한맺힌 세월이 백년이 다 되어서야 바로 세워지는 역사의 힘으로 김개남장군을 기리는 추모비가 1993년 5월 30일 전주 덕진공원에 우뚝 세워졌다. 그리고 박봉양의 비는 수풀속에 쓰러져 있다가 올해사 다시 세워졌으니 뉘라서 세상을 알랴. 역사를 알랴.
81년 시로 승격되어 십몇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남원시의 인구는 7만을 겨우 웃돈다고 한다. 열악한 재정과 낙후된 지역 경제의 표본인 이 남원에서 1894년 7월 15일 전주화약후 현재의 국면을 타개항 방책으로써 농민군 대집회 남원대회가 열린다. 7만여명의 전라도 농민군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세 지도자의 의견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중점적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전: 지금의 정세를 보면 왜와 청이 싸우고 있으나 한 쪽이 이기면 반드시 군사를 우리 쪽으로 돌릴 것이다. 우리는 무리가 많으나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흩어져 끝내 우리의 뜻을 이루기 힘들 것이다. 그리니 귀화를 빗대어 각 고을에 흩어져 있다가 천천히 상황변화를 살펴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김: 대중은 한번 흩어지면다시 모으기가 어렵다.
손: 우리가 봉기한 지 반년이 되어 비록 한 도가 호응한다고 하지만 명성있는 사족들이 따르지 않고 재산있는 자들도 따르지 않고 글 잘하는 선비도 따르지 않는다. 더불어 접장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천인들로 화를 즐기고 약탈하는 것을 좋아하는 무리들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니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사방으로 흩어져 목숨이나 온전히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봉준은 외부의 사정에 말려들기보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이었고 김개남은 대중이 한번 흩어지면 모으기가 어려우니 물리적 대응을 하자는 강경론을 폈으며 손화중은 대체적으로 회의적이어서 흩어져 목숨이나 도모하자는 쪽이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침입했고 일청전쟁을 일으켰다.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제휴하여 집강소 통치를 공고히 하였고 김개남은 피서를 핑계로 임실 성수산에 있는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
1993년 5월 22일 나는 서울에 갔다.
5월 30일에 덕진공원에 세우기로 한 김개남 장군 추모비문을 신영복 선생이 썼고, 가지러 오라는 연락이 와서 였다. 나는 그 전날밤, 무던히도 잠을 설쳤다.
시집가기 전날밤이 그렇게 길었을까? 나는 몇번이고 아내를 깨웠다. 새벽 첫차로 서울로 갔고, 친구 최대길과 함께 목동에 있는 신영복 선생댁에 갔다.
그집에서 신영복 선생이 손수 끓여준 커피 한잔을 마시고,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했다. 역사문제연구소도, 집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난처했다. 만나고 가야 하는데, 그러자 친구가 근처에 파리공원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잠시 쉬었다 나와 전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간 곳이 파리공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현대식 공원 파리공원에서 산책나와 있던 김지하 시인을 만날 줄이야 나는 세번을 바라보고서야 이방인 처럼 앉아있는 그가 김지하 시인임을 알아보았다.
“저 혹시 김지하 선생님이시지요,” “예 그렇소.”
“저는 선생님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주 5월 30일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우는 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받으러 왔던 길입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손과 내 어깨를 꼬옥 잡았다.
“참으로 좋은 일이요. 잘한 일이요.”
그 곳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퍼버리고 앉아 김개남포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전봉준,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은 농민혁명이 끝나면서 막을 내리고 온전히 동학정신이 살아남은 것은 김개남포였다는 이야기.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무서운 혁명적 열기로 사방을 제패했으며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이 농민혁명이 끝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 그들이 결국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고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그리고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두시간이 넘도록 들었다.
“장모님(소설가 박경리)이 김개남 장군의 영원한 팬이요, 토지의 전편에 나오는 김개주가 그분이요, 장모님이 알면 무척 기뻐할 것이요, 오늘 밤에라도 원주로 전화해 주시요”
김지하선생의 말에 전주에 도착하자 마자 원주에 있는 박경리선생댁에 전화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로 서울에 가서 우연히 김지하 선생을 만났고 박경리선생님에게 전화해 드리게 되었다고 했더니 “잘한 일이여. 내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자랐다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썼었지.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인 혁명가야. 내가 그래서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양반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해도 안쓰잖아. 토지 끝내고 나면 전주에 한번 갈께” 들뜬 그 목소리.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에 실려오는 기쁨에 찬 목소리. 아련하게 멀어져 갈 때 나는 추모비를 세울려고 준비하는 도중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어려웠던 일들, 그리고 그날 하루가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 하나를 세우는 것도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다. 엄창난 인연이 모이고 모여 세워지는 것이다. 김지하 선생이 남녘땅 뱃노래에서 남원과 김개남에 대한 원인 제공을 했고 우리들은 그 일을 오랜 시간을 두고 추진했으며, 그 글씨를 신영복선생이 썼다. 그리고 그날 세 사람이 만났을 뿐더러 소설속에 처음 김개남 장군을 등장시킨 박경리선생님과 그날이 가기 전 전화를 통해 원주에서 전주, 전주에서 원주의 다리가 놓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우리들의 모든 인연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들의 만남, 우리들의 모든 헤어짐까지도....
1. 일시: 2019년 6월 29(토요일)
2. 출발시간 및 장소: 서울 아침 7시 양재역 12번 출구 국립외교원. 앞 출발
전주 오전 9시 10분 전주 종합경기장 앞 출발
3. 참가비: 5만원
4. 어디로 가나요:
태인 피향정, 만석보, 백산, 순창 피노리, 회문산 종성리, 김개남 집터와 묘소,
5 안내 도반. 신정일(<갑오동학혁명답사기>의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1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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