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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2012.10.09 06:40

물님 조회 수:6216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의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

 

 

● 시_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우리는 매일매일』『훔쳐가는 노래』가 있음.

진은영은 어떤 울퉁불퉁한 현실도 두루뭉술한 심리도 섬세한 이미지들로 반짝반짝 살려놓는다. 이미지는 시의 나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진은영은 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그 언어로 말하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시를 쓸 때면 독실한 신자가 방언을 하듯 저절로 말이 그리 터지는 듯하다. 타고 난 재능이기도 할 테고, 시인 정신의 건강이 삶의 피로에 지지 않은 증표이기도 하리라.

진은영 시는 이미지뿐 아니라 서사도 살아 있다. 리듬도 좋고.

「훔쳐가는 노래」는 착취에 대한 시다. 화자는 가난한 아가씨를 호려서 우려낸 돈으로 도박판이나 기웃거리는, 악당에 가까운 건달이다. 말은 달짝지근하게 잘한다. 어쩌면 화자는 진짜, 조금은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아가씨가, 다치지 않으면 새 잎이 돋아날, 초봄 자두나무의 포르스름한 눈처럼 애틋하게 보이기도 하니까.

진은영 시는 해석의 경로가 여러 방향으로 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시에서도 아가씨를 대책 없이 순진하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시의 절정인 7연에서 독자의 가슴은 무너진다. 아가씨와 달리 순진하지 않지만, 화자 역시 속수무책 사회적 약자다. 순진하건 순진하지 않건, 절망이 그들을 쓸고 가버릴 거라니!

어쨌든, 귀에 달콤한 노래로 속삭이는 자를 다시 보자. 내 소중한 것을 훔쳐가려 그러는 건지 모른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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