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길을 찾아 국토를 답사하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5월 11일로 지정되었고, 그 일환으로 ‘천년의 길’이 <전봉준의 길>이라는 주제로 전봉준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전라도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공주 거쳐 서울에 갔고, 영풍문고 앞에서 그날의 전봉준을 만났다.
부릅뜬 눈, 형형한 눈빛이 지금도 입을 열어 나에게 말을 건넬 것 같았고, 나는 전봉준의 동상 앞에서 그날 그 때를 추억했다.
“서울로 끌려간 전봉준은 을미년인 1895년 이월 초아흐레 첫 심문을 받았다. “죄인을 일으켜 앉히라.”는 법관의 말에 “네 어찌 감히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 되받았다.
다시 법관이 “동학당은 나라에서 금하는 바이거늘 감히 도당을 모아 난을 일으켜 군기군량을 빼앗고 양반과 부자들을 욕보이며 종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새 나라를 도모코저 하였나니, 이는 곧 대역불괴의 범죄를 범한 것이거늘. 네 어찌 죄인이 아니라 이르느뇨?” 법관이 그의 죄를 낱낱이 들어 따지자, 전봉준은 타는 눈길로 말했다.
“도 없는 우리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좋건 그르건 남의 나라의 도학만을 추세하고 의뢰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냐? 외방으로부터 들어온 유,불, 선, 도나 서학에서 대해서는 오히려 말이 없고 우리나라에서 주창하는 동학만을 유독 배척함은 네 무슨 뜻이냐? 동학은 자국의 소산이라 싫다는 것이냐? 동학은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니 그 뜻이 싫다고 금하는 것이냐?”
한숨 돌린 전봉준은 다시 말을 이었다.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자고 하는 것이니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라 죄로 될 수 없으며 조상의 뼈다귀를 울쿼 행각을 하며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하여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어찌 하여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자기나라를 해하는 무리니 그 죄가 자못 크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하느냐?” 라고 말한 뒤 그를 심문한 법관을 나무라자 법관은 국태공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를 물었다. 전봉준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네 감히 어리석고나. 대원군은 유세한 자다. 유세한 자가 어찌 하향 백성을 위하여 동정이 있었겠느냐!”
법관이 그래도 악형을 가하며 심문을 계속하자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그의 말은 의연했다.
그 때 일본인이 전봉준에게 찾아와 국사범이기는 하나 사형에까지 이르지 않으니 살려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 그런 비열한 마음을 가리고 내가 어찌 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의 말을 거절한 전봉준은 법무아문으로부터 <군복기마로 관문에 작변한 자는 곧바로 참한다>는 판결문을 받았다.
전봉준은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말하였다.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레 봄비가 주절주절 내리는 가운데, 전봉준은 그의 동지였던 손화중, 최경선, 성두한, 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법관이 전봉준에게 마지막 할 말을 하라고 묻자
“나는 다른 할 말은 없다.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인의 굳센 기개를 잃지 않았던 전봉준을 그 당시 집행총순을 맡았던 사람은 훗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의 행동을 잘 살펴보았다. 그는 과연 보기 전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이는 감이 있었다. 그는 외모부터 천인 만인 속에 특별하게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청수한 얼굴과 정채 있는 미목으로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는 세상을 한번 놀랠 만한 대위인, 대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표적으로 대 창작으로 한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의 뜻을 굴치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
오지영, <동학사>에 실린 글이다.
어지러운 세상 수난의 땅 남녘에서 태어났던 의로웠던 영웅 전봉준은 가슴에 사무치는 유시 한편과 ‘새야 새야 파랑새야’만 남기고 그렇게 갔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다.
운명(殞命) 전봉준 유서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時來天時皆同力)
운이 다하여 영웅도 어쩔수 없구나 (運去英雄不自謀)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냐 (愛民正義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愛國丹心誰有知)
그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렇다면 오늘이 이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세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농민군들의 정신이 이어져, 3,1운동, 해방, 4, 19의거,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오늘이 이 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영령에 깊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2019년 4월 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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