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호선생님 지료 -- 신동아 2000,12
2023.05.30 23:09
신동아 2000년 12월호 특집에 소개된 현제 김흥호목사님 자료입니다. 이 글을 읽고 이대 교
목실에서 선생님을 기인 괴짜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항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드
린 적이 있다. 내 인생에 두 번 삼 배의 절을 올린 선생님이 그리운 밤이다. 선생님의 저서 중
에 한 권이라도 가까이 할 것을 권한다.
참고로 신동아 12월호에는 동광원 김준호선생님도 소개되었다.
숨
특집|한국의 기인·괴짜 10인 열전
주역 성경 넘나드는 道人목사 김흥호
김홍근
입력
2006-07-28 10:21:00
목사이기 이전에 도인이자 철학자. 35세때 주역을 묵상하다 문득 견성한 동양적 기독교인.
하루 한끼, 새벽 찬 목욕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해 온 노스승의 悟道頌(오도송).
김흥호(金興浩·81) 교수는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하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해온 사람이다.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 귀를 뚫었고(聲聞), 각고의 노력으로 눈을 뚫었으며(緣覺), 자기를 이김으로써 코를 뚫고(菩薩), 평생을 대학강단과 고전연구 모임에서 강의하며 입을 뚫었다(佛陀).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체득’했다는 말은 그가 곧 ‘본(視)’ 사람이란 것을 뜻한다. 그는 견성(見性)을 했기에 관(觀)을 갖게 된 눈 밝은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본질은 ‘나를 보고 나를 아는 것’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았기에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기를 이기는 힘이며, 외적으로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힘이다. 불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을 법보시(法布施)라고 하지만, 김교수도 평생을 강의하는 데 바쳤다. 한국 정신계의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지붕 끝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땡그랑땡그랑 울리는 풍경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渾身似球掛虛空 혼신을 다해 허공에 매달려
一等爲他談般若 오로지 이웃을 위해 말씀을 전하네
東風西風南北風 동에서, 서에서, 남북에서 불어올 때마다
滴了滴了滴滴了 딸랑 딸랑 딸딸랑 (여정의 풍영시, 한글 번역은 필자)
그리고 그 고요한 풍경 소리의 여운은 잎이 다 떨어져(樹凋葉落) 발가벗고 서서 늦가을 바람에 알몸을 드러낸 채(體露金風), 시리도록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빨간 홍시로 연결된다. 언젠가 젊었을 때 그가 쓴 아래의 글은 이제 팔순 고개를 넘은 그에게 그대로 자화상(自畵像) 같아 보인다.
지붕 위에 감이 새빨갛다. 다 익은 것이다(盡性).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仁)이라고 한다. 자기 속알(德)을 가진 사람이요, 지붕 위에 높이 달려 있는 감처럼 하늘 나라를 가진 사람이다. 사랑의 단물이 가득 차고 지혜의 햇빛이 반짝이는 높은 가지의 감알, 그것이 어진 사람이다. 완성되어 있는 사람, 성숙해 익은 사람, 된 사람, 다한 사람, 개성을 가진 사람, 있는 곳이 그대로 참인 사람(立處皆眞), 언제나 한가롭고(心無事) 어떤 일에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事無心), 동양에서는 이런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다. 다 준비되어 있는 사람(平常心), 더 준비할 것이 없는 사람(無爲),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命) 말이 쏟아져 나오고(道)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인이라고 한다. 인은 된 사람이다. (‘생각없는 생각’, 김흥호, 솔刊, p.16)
어질 ‘인(仁)’은 ‘씨’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 알의 감에 성숙한 인격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 글은 목사인 그가 가슴속에 담고 있는 예수를 그린 것이다. 높은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달린 그 감은 자신을 인간의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그러나 “김흥호 교수의 글은 그 글이 그대로 그 사람임을 나는 믿습니다”고 평한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말처럼, 수십 년 간 여러 후학에게 말씀의 성찬을 베풀어온 그도 이제 붉고 동그란 단감이 되어 뭇사람의 먹이가 되고 있다.
김흥호의 사람됨을 깊게 이해한 네 사람이 있다.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지기(知己) 안병무와 변선환, 그리고 일본인 선승(禪僧) 마쓰나가다.
먼저 다석은 김흥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함석헌의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다석 선생은 병상에 누운 청년 김흥호의 병이 마음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꿰뚫고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 ‘계시’라는 뜻의 김흥호의 호 현재(鉉齋)는 다석이 내려준 것이다. 여러 차례 공동묘지 입구까지 실려갔던 김흥호는 다석을 만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병치레를 해본 일이 없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자인 안병무와 변선환은 김흥호의 득음(得音)을 알아차린 친구들이다. 평양고보 동창인 안병무는 김흥호가 나이 40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미 깨쳤는데 뭘 고생스럽게 나가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기어이 떠나는 친구에게 안병무는 ‘이 세상에서 제일의 죄인은 목사이니 제발 목사가 되어서 돌아오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흥호는 미국에서 감리교 목사가 되어 돌아온다.
“自性을 보았는가?”
김흥호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1950년대 후반부터 같은 학교의 이효재, 이남덕 교수 등과 동양고전 독서회를 조직하여 공부하면서 학생들에게 철학 특강을 했는데, 교목(校牧)이 된 후 강의원고를 풀어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으로 1970년부터 12년간 개인월간지 ‘사색’을 발행한다. 그 잡지의 권두언을 읽던 변선환은 그 글이 ‘김흥호라는 한 한국인의 마음에 비친 그리스도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스즈키 다이세쓰의 제자로 미국 시카고 선(Zen)센터 소장으로 있던 마쓰나가는 1970년대 초에 한국의 선사들을 만나보려고 내한했다. 그는 자신을 안내해줄 사람을 수소문하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버틀러대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을 공부하여 일어와 영어가 능통한 김흥호를 소개받았다. 전국의 각 사찰을 일주하며 고승들을 만나보고 서울로 돌아온 마쓰나가는 한국을 떠나기 전 동국대에서 한국의 식자들을 상대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을 하는데 청중석에서 선문답식의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 동안 전국 각지를 함께 다니며 숱한 대화를 나누면서 김흥호의 깨달음의 경지를 잘 알게 된 그는 김흥호에게 대신 대답해줄 것을 요청했다. 즉석에서 입을 연 김흥호의 거침없는 법담은 좌중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마쓰나가는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저명한 불교신문에 한국의 선불교 순례 경험을 기고했다. 그 글에서 그는 한국에 가보니 뜻밖에도 기독교 목사인 김흥호가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소요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적었다.
그 기사는 한국 불교계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한 수좌가 김흥호를 찾아왔다. 김흥호를 점검할 요량으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자성(自性)을 보았소?”
김흥호는 대답했다.
“그렇소. 보았지요.”
놀란 승려가 되물었다.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김흥호가 대답했다.
“석가모니는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소?”
말문이 막힌 그 승려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돌아가서 어느 불교지에다 김흥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김흥호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1919년 황해도 서흥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김흥호는 철이 들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품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 방학이 되어 본가가 있던 고향 대동강 두로도(豆老島)에 돌아오면 마을 교회에서는 14살에 불과한 그를 평양고보생 인텔리라 하여 설교를 시켰다. 독립지도자로 활동하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김흥호가 10살 때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당신이 세운 교회의 강단에 섰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설교를 하는 진땀나는 경험을 한 김흥호는 그 뒤 틈날 때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기록하였다. 방학 때 고향에 돌아가 강단에 서기 위해서였다. 이후 평양 남사현 교회에서 이윤영, 이완식, 홍기주, 홍기횡, 최근필 목사, 조만식 장로 등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 ‘나가자!’를 듣고 깊이 감동받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남들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그는 내심 무척 괴로워한다. ‘진정한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흥호의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으로 세 차례의 굴곡을 겪는다. 먼저 10대 후반에는 당시 식민지 체제하에서 의기소침해진 한국인들을 고무하기 위해 크게 유행하던 부흥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그 후 2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면서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 강의를 듣고 신앙적으로 새로 눈뜨게 된다. 그는 무교회주의자 선생들의 전집을 탐독하면서 기존 부흥회식 기독교, 즉 ‘유(有)교회적 입장’에서 양심에 따른 지성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무(無)교회적 입장’으로 옮긴다. 이 입장은 후에 다석 유영모를 만나면서 유와 무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가온(中)교회적 입장’으로 승화된다. 그는 다석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어릴 때부터 품어온 문제인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를 풀게 된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1947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다. 생면부지의 서울에서 갖은 고생을 하던 그는 정인보 선생을 찾아가 선생의 소개로 국학대학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을 한 후 철학개론 교수로 채용된다. 당시 나이 많은 학생 중에는 ‘주역’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고 해서 동양철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먼저 정인보 선생에게서 양명학을 배운 뒤, 이광수를 찾아간다. 춘원은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고당 조만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유영모를 알게 되었는데, 그를 ‘시계 같은 분’으로 부르며 외경하고 있었다(당시 함석헌은 4학년생이었다). 춘원은 김흥호에게 다석을 추천했고, 정인보 선생도 다석에게 찾아가라고 권했다.
1948년 봄 김흥호는 처음으로 유영모의 성경 강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첫날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후에 이 삼재(三才)사상은 김흥호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에 핵심을 이룬다.) 김흥호는 다석에게서 무서운 힘을 느꼈다. 말씀엔 인격의 무게가 실려 가슴으로 바로바로 육박해 들어왔다. 다름아닌 지행합일을 실천하는 힘이었다. 김흥호가 본 다석은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이고 정좌를 하고, 평생 걸어만 다녔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참사람(眞人)이었다. 다석(多夕)이란 호에는 하루 세 끼를 저녁에 합쳐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겨울 아침, 바다에 뛰어들다
김흥호가 파악한 다석의 실천(道)은 ‘一坐 一仁 一食 一言’의 ‘하루살이’이다. 즉 새벽에는 일어나 꿇어앉아 공부하고,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저녁에는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밤에는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침은 ‘봄’이요 따라서 꿇어앉아 동서의 고전을 ‘보며’, 낮은 ‘여름’이요 따라서 열심히 ‘열음질(농사)’을 하고, 저녁은 ‘가을’이요 따라서 겸허하게 ‘갈무리(추수, 즉 식사)’를 하고, 밤은 ‘겨울’이요 따라서 깊은 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다석은 하루를 곧 일생처럼 살았다. 밤마다 십자가에 달리고, 아침마다 부활했다. 그는 그의 정신일기(多夕日誌)에 하루하루를 셈하여 기록하였다. 그에게 있어 ‘오늘’은 언제나 ‘오!(감탄사) 늘(영원)’이었다.
김흥호는 스승이 실천해 보인 그 길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걸어갔다. 심지어 새벽에 냉수마찰을 하는 스승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지지 않기 위해, 제자는 피란지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겨울에 아침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 특별한 사제관계였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도인(道人)의 삶이라면, 김흥호의 삶은 바로 그 전범이라 할 수 있다. 김흥호는 훗날 다석의 도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體化)한 후 이렇게 요약하였다.
一食晝夜通 一言生死通
一坐天地通 一仁有無通
김흥호는 다석을 따라 다닌 지 3년 만인 어느 날 북한산 구기동 계곡 폭포가 있는 곳에서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한 다석의 설명을 듣고 귀가 뚫리는 경험을 한다. 그 후 다석은 본인이 67세 되는 날 세상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스승의 말을 철석같이 믿던 김흥호는 그 다음날 스승의 장례를 치르려고 댁으로 찾아가던 도중에 길에서 다석을 만났다. 그 순간 김흥호는 세상을 떠난 것은 다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심신이 지극히 쇠진해 있던 김흥호는 어머님의 간절한 권유로 결혼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석은 한사코 제자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너무나 병약하던 김흥호는 오로지 쉬고 싶어 스승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다. 이때 그는 신촌에 있던 천막교회를 인수받아 대신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결혼을 했어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주역’에 몰두했다. 매일 한 괘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35살 되던 해 3월17일 오전 깨달음을 얻는다. 평소 다석은 한국인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구약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동양의 유불선(儒佛仙) 삼교와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의 근본 오의(奧義)를 회통한 후 그 견처(見處)를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으로 남겼다.
斷斷無爲自然聲 자신을 텅 비웠을 때 자연과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卽心如龜兎成佛 마음의 본체를 깨치면 만물이 부처다
三位復活靈一體 부활한 정신에 성부 성자 성신이 하나의 영으로 빛난다
天圓地方中庸仁 하늘과 땅의 진리는 인간에게서 구현된다 (한글 번역은 필자)
김흥호도 이날부터 일식(一食)에 들어갔다. 그리고 석 달 뒤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스승을 찾아가 보여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중용’을 우리말로 옮겨 스승에게 보였다. 그때 마침 다석의 집에는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이정호 전 대전대 총장이 찾아와 있었다. 김흥호는 다석이 이정호 교수에게 자신이 번역한 ‘대학’을 보이며 “이 글은 공자께서 번역하셔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김흥호를 향해 “이것은 김군이 쓰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김흥호는 연세대, 이화여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면서 유, 불, 선, 기독교의 주요 경전을 3년간씩 총 12년 동안 읽어나갔다. 1963년 44세 되던 해, 미국으로 교환교수 겸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동 대학에서 종교사학 석사학위를 받는 한편 웨슬리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전 미국 감리교단의 비숍(감독)이며 한국 감리교 명예감독이었던 레인즈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인디애나주 감리교회의 정목사로 등록된다.
1970년대에는 난곡 김응섭 선생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1984년 65세로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을 한다. 그해 영국으로 가서 재영국 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귀국,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지금까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동양고전과 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법화경과 신약성경을 강의하고 있다. 첫 시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둘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성경 내용이 동양적 정서로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그 동안 강의해온 동양고전은 왕양명의 ‘전습록’ ‘주역’ ‘다석일지’ ‘도덕경’ 등으로 제자들이 구술한 것으로 솔출판사에서 전 30권 분량의 ‘김흥호 전집’으로 발간중이다(현재 6권 발간). ‘견성(見性)한 목사’ 김흥호가 남긴 말은 21세기의 본격적인 종교 교류시대에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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