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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2020.10.27 08:12

도도 조회 수:6226

20201025



그대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마태복음 1724~27

진달래교회 이병창목사

 

건강보험료 고지서를 자세히 읽어보면서 살기 좋은 세상이란 세금이 없는 세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꿈꾸는 이상세계는 요순시절처럼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여유로워 심지어는 군주의 존재까지도 잊고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세상일 것이다. 요순시절의 정치는 선양이라는 권력 물림 방식으로 다툼이 없었다. 선양은 당시 가장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후대의 혈연에 따라 왕위를 물리던 세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격앙가는 다음과 같다.

日出而作 / 해가 뜨면 일하고

日入而息 / 해가 지면 쉬고

鑿井而飮 / 우물 파서 마시고

耕田而食 / 밭을 갈아 먹으니

帝力于我何有哉 /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요임금은 20살에 왕위에 올라(중국정부 공식발표 2015- 기원전 2333, 한국 고대사 연구자 - 기원전 2357)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百官)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요임금이 민정을 살피러 나갔는데 왕의 행렬에는 아랑곳없이 뽕잎 따기에만 열중하는 한 처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 친히 다가가니 그 처녀의 얼굴에 커다란 혹이 하나 달려있었다. 요임금은 순간 실망하였으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의 현명함에 끌려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왕비의 가마가 궐에 당도하자마자 왕비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요임금의 아내다. 내 손으로 진지를 차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니 모두들 비켜라.” 그녀는 정성껏 수라상을 준비한 다음에 사치스러운 수라간 궁녀들의 복장과 경박스러운 행동들을 지적하며, “오늘부터 백성들보다 사치하는 자, 농어촌의 선량한 아낙네들보다 호의호식하거나 더 게으른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들의 어버이이신 임금을 섬기는 자들이 백성들보다 예와 도리가 모자란다면 어떻게 임금께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날부터 나라의 질서와 도덕이 하루가 다르게 바로 서고 꽃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순시절이란 왕 혼자서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사마천은 설파해주고 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두 가지 세금

 

마태는 세금에 대하여 종교적 세금인 성전세(17:24-27)와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22:15-22)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성전세는 유다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주민세는 그리스도인과 로마제국 곧 황제 권력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유다 관리들은 성전을 운영하기 위해서 두 드라크마(반 세겔)를 징수했다. 관리들이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베드로에게 물은 것을 보면 성전세는 세리들이 강압적으로 걷던 주민세와는 달리 자발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랍비들은 성전세에 대해 의미 부여하기를 성전과 율법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기대, 곧 보속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베드로는 예수께 성전세 납부 여부에 대해 확인도 하지 않고 내신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고 계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성전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한테서 관세나 주민세를 거두어들이는가? 자기 아들들한테서인가, 아니면 남들한테서인가?’하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남들에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자기 자식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서 예수는 중요한 한 말씀을 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전세로부터 자유롭지요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교회 공동체의 본질은 바로 이 한마디에 있다. 마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로 대체해서 사용하고 있다.

마태는 일관되게 그리스도인은 자유혼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직계 자식들이다. 따라서 성전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마땅히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어떤 의무도 준수할 필요가 없다. 마태가 드러내는 예수의 정신은 인간은 성전과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본질상 자유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마태는 18,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생활과 질서에 대한 가르침 앞에 성전세와 관련된 말씀을 앞에 두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편협한 규칙이나 규범을 통해 스스로 노예로 만드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인가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식의 겁주는 율법 준수는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다. 면죄부를 사야만 천국에 가고 지옥 간 조상들이 최소한 연옥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종교장사꾼의 논리로 복음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복음은 간단 명료하다. ‘그대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대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노력을 하고 댓가를 지불해야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해도 함께 살려면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질서는 인간을 강제하는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념의 세계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강제하는 원칙들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러나 모든 규칙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인간이 지유롭고 품위를 유지하려면 신호등을 지키듯 일정 부분 규칙을 준수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자유롭다고 비키니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일 것이다. 바로 이에 대한 지혜를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아오라는 요구로써 보여 주신다. 가장 먼저 잡힌 물고기 입에는 네 드라크마가 있었다. 베드로와 예수는 그 돈으로 성전세를 바칠 수 있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은 자유인은 믿음과 양심의 규칙이 아닌, 외적인 규칙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강력하게 확보할 수 있음을 지혜롭게 보여준다. 기왕이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움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오직 자발적인 자유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고백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게 계신다. 우리는 무한한 자유로움 속에서 교회공동체와 만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넉넉한 가슴을 준비하고 키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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