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
2020.11.29 04:13
마태복음19장 16-30. 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
공관복음에 모두 등장(막 10:17-22. 눅 18:18-23)하는 이 기사를 종합해 보면 주인공은 부자 청년관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문이 좋고 일찍 관직에 입문한 엘리트로서 세상이 규정하는 성공의 기준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겸손했고 선한 일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앞서 등장한 용서의 주제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수를 헤아리는 7번 용서와 7번씩 일흔 번의 헤아림이 없는 용서 없음의 용서 차원이 비교되었던 것처럼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한다. 일곱 번이란 양적인 차원이라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란 질적인 차원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양적인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 문제임을 밝혀주고 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의 배경에는 그가 받은 유대교 종교 교육이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서의 영생은 인간의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젊은이는 인간이 쌓은 공로에 의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바리새인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행해온 선한 일을 가지고 과연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찾아온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자신의 기준에 선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봉사가 눈떴다고 태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태양을 보게 된 것일 뿐이다. 질문한 사람에게 있어 선하다고 하는 가치판단과 행동은 자기중심적인 의식선 상에 있다. 질문자는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자신 때문에 힘들었던 같다. 몸이 아퍼야 약을 찾고 의사를 찾는 것처럼 그가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한 내적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란 ‘이미 있음’ 또는 ‘존재’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가 누리고 있는 재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만나는 것마다 장애물이 되는 애벌레 상태로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냐고 묻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는 ‘부자(부자 청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에는 주 출입구인 큰 성문과 밤 또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작은 문이 있었다. 작은 문은 사람이 허리를 숙여야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그 문으로 낙타가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해 낙타(카멜로스)가 밧줄(카밀로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빗댄 것으로 이해했다.
애벌레가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나 그 내용이 은유하는 바는 다를 바가 없다. 젊은이는 많은 재산을 모았어도 무한한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선행도 하고 해보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영적 허기 때문에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물은 것이다. 그의 선행은 푼돈의 구제였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한으로 풀어도 좋을 것이다. 유한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물은 것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선한 분도 하나님이고 오직 무한한 분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했다. 무한을 네 생각 안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무한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의 유한한 생각이 깨어져 무한히 확장될 때 바늘구멍으로 달이 보이듯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바늘구멍이 무한히 확장되면 낙타도 코끼리도 즉 네 자신도 통과할 수 있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나’에게 모실 때 가능하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갇히게 되면 이기적 욕망이 발동하게 되고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창조성이 좀먹을 뿐만 아니라 물질에 포로가 되고 만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생명체로서의 원동력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와 힘의 원천이다. 인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무한의 존재이다. 그분은 나의 보호자이며 안내자이다. 인간은 무한을 열어가는 존재이다. 믿음이란 이성, 감성, 의지의 모든 영역 모두에서 한계 없는 의식으로 자신을 넓혀 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이고 위대함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젊은이는 길을 나서지 못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정작 예수께서 오라고 하면 움직이지 못하는 면모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천국을 원한다고, 자유와 행복을 원한다고 하면서 젊은이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각자에게 해당되는 장애물이 있다. 위대한 일을 하려는 사람, 위대한 길을 떠나려는 사람은 자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제자의 길은 멀리 제쳐 두고 쉬운 방법으로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다. 예수는 제자를 원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취미 수준의 종교를 원하고 있다. 나는 어느 젊은이에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지 말고 취미란에 적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좋은 바탕을 가진 젊은이는 재산을 팔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의 제안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의 면모에 대하여 성서는 ‘풀이 죽어, 근심하며’라는 말로 대변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예수에게 풀이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무한을 추구하는 의식은 지고한 의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깨달아 가는 길이다. 지적이고 영적인 완성의 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무한을 찾아가는 길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종교의 틀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이 지구학교에 보내 주신 분의 뜻을 이해하고 무한을 향한 여정을 가게 된다. 햇빛도 한 점에 모으면 불을 일으키듯이 하나님이라는 한 점에 초점을 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바늘귀를 넉넉하게 통과하는 낙타가 된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유한을 초월하여 무한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낙타와 바늘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숨 떨어지면 없어지는 나가 아니라 위대한 ‘나 AM’이다. 하나님의 중심으로 들어갈 때 나는 ‘나’로부터 해방된 나가 된다. 나의 중심, 우주의 중심에 그분이 계신다. 그 중심을 향하여 가는 길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그러나 물질의식으로 자신을 채울수록 그 중심에서 멀어져 간다.
예수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 사람에게 먼저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에서 돌이킬 것을 말씀했지만 그는 돌이키지 못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최고의 인연을 만났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밥상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무한과 지고한 의식을 붙잡을 기회를 유한한 재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이를 깨달았을까?
오늘이라는 삶은 너무나 귀하다.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존귀하다.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대하는 지혜가 하나님을 향해가는 길이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아버리면 설탕의 형상은 사라진다. 나 없는 나의 길, 여기에서 여기로 가는 길에 우리는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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