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2장 1-14 하나님의 잔치판 - 숨님 메시지
2021.01.12 09:07
202210110
마태 22장 1-14 하나님의 잔치판
숨 이병창
22장을 읽다가 한국에서 최초로 사회장을 치렀던 월남 이상재선생이 떠올랐다. 지금의 YMCA인 황성(서울) 기독교 청년회에서 주관하는 수많은 강연회에서 사회를 보았던 월남선생은 그에 따른 일화가 많이 있다. 그 시절은 일본 경찰의 사찰이 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선생이 사회를 보고자 단상에 올라서니 많은 일본 형사들이 섞여 있었다. 이상재선생은 먼 산을 물끄러미 쳐다 보시다가 “때 아닌 개나리 꽃이 이리도 많이 피었을까?” 하고 말씀하니 청중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폭소를 터뜨렸다. 형사는 개로, 순사는 나리로 부르던 그 시절에 개나리꽃으로 비유한 선생의 기지에 청중들이 배를 잡고 웃어대자 무안한 형사들은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엄혹한 시절을 감내해야 했다는 점에서 예수와 이상재의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촌철살인의 비유를 통하여 귀 있는 자는 알아들었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다. 예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아니 하셨다고 할 만큼 비유는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 중요한 소통의 방식이었다.
@ 언어 사건
언어학자들은 비유를 ‘언어 사건’(Language event)이라고 말한다. 1920년대에 철학 학회지에 등장하는 이 말을 신학계에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 에른스트 푹스(1903.6.11.-1983.1.15. 독일신학자, 신해석파. 언어사건을 학문적으로 정립)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면서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각 사람에게 언어사건을 구성하고 새로운 자기 이해(self- understanding)를 낳는다고 보았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예수의 영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말씀은 문자를 초월해서 언어 사건으로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살아있는 믿음은 언어로 다가온 말씀이 나에게 사건으로 육화되고 기화가 되는 데 있다.
비유를 들었을 때 ‘이게 무슨 뜻이지?’하고 생각하게 되고 이어서 그 의미를 깨닫고 ‘아하’하는 순간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비유는 인간 의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삶에 대한 시각을 바뀌게 한다. 예수의 비유 말씀이 시공을 초월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 때문이다. 비유의 말씀을 읽는 태도는 그 비유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눈이 떠지는 언어 사건이 되게 하는 데 있다.
@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나’
왕자의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은 세상 사람들과 혼인 잔치를 하도록 예수를 지구에 보내신 하나님이시다. 잔치에 초청하기 위해 왕이 보낸 종들은 각 시대마다 그 역할을 감당했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의 초청은 잔치에 앞서서 오래동안 이루어져 왔다. 이제 잔치의 때가 왔다. 왕은 자신의 종들을 다시 보내 혼인 잔치가 이제 시작되고 준비된 잔치음식이 있으니 잔치판에 오라고 초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불응한 이유는 다른 일들(사업, 돈, 성공---)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잔치를 거부한 사람들은 초청에 응하지도 않았고 왕의 종들까지 죽였다. 이 표현은 안일한 삶에 매몰된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던 예언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아온 이스라엘 역사를 상기시킨다. 거절에 대한 벌로 왕은 군대를 보내어 징벌했다. 이런 표현은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예수를 거절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는 마태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왕은 또 다시 종들을 보내어 모든 곳에 가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선한 자, 악한 자를 불문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곳에서 초대받았다. 사회적 윤리적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은 모두 초청받았다. 예수의 십자가 옆에 있던 한 강도는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린 채로 초청에 응하여 낙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인 이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만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양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다.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면서 식탁을 함께 하는 곳이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혼례복
왕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둘러 보다가 혼례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았다. 이스라엘에서의 큰 잔치는 잔치 때 입을 예복까지 초대받은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석에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믿음, 사랑, 선행 등이 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의 기본 예의는 자신을 과시하는 화려한 옷이 아니라 정갈한 옷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잔치에 응답한 사람들은 자기 옷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를 신랑인 로고스와 신부인 영혼의 영적 혼인을 통해 얻어진 공동체로 풀이했다. 나의 영혼은 로고스와 만남으로써 불멸성을 얻는다. 인간은 누구나 지구에 보내어진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 되어가는 자기화의 여정이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인간의 목표가 있다. 내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신호를 보낸다. 지금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지금 바쁘잖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하면서 눌러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죽이고 있다. 많은 활동으로, 돈 버는 일에 바빠서 등등의 이유로 자신의 영혼이 말하는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왕의 종들을 죽이는 것은 생존의 욕구에 사로잡힌 나의 에고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종들을 보내고 계신다. 이 초청에 응답할 수 있는 기회는 살아있는 동안일 뿐이다. 나의 내면에는 많은 영역이 있다. 내가 찾아 써야 할 재능과 재원들이 버려져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은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아픔과 상처와 한이 있다. 바로 그것들이 나의 약점이고 악한 것이라 해도 사랑의 예복으로 잘 싸서 하나님의 잔치인 예배에 가지고 갈 예물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약점 많은 나라고 하는 존재와 삶의 조건들을 하나님께 내드려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조건들을 예배 때 내놓지 못하고 다시 가지고 간다면 삶의 잔치는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있다. 내 인생에 눈물과 통곡과 불안이 있을 때 그것을 계속적으로 싸들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선과 악이,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다. 빛은 어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빛깔에는 그림자가 들어 있다. 데카그램 도형의 좌우 날개는 인간의 숙명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그림자 속에 은혜의 보물들을 숨겨 놓으셨다.
오늘의 비유는 나의 그림자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위에 하나님이 우리를 감싸시는 옷, 곧 자비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한다.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고 사는 데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잔치판인 지구별에서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의식없는 상태로 자신을 파괴하면서 멸망하는 짐승처럼 살다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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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ew Day Has Come.
Today is a Gift.
나의 상처들과 부족함을 감싸주는 정갈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오늘도 나아갑니다.
오늘이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