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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수다쟁이

이 병 창 ( 시인. 진달래교회 목사)

 

대학 2년생 딸을 둔 부모가 상담 차 방문을 했다. 나는 딸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머니가 대답을 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녀는 딸을 대신해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딸이 정신박약이나 유치원생이냐고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말만 유창하게 변명 삼아 늘어놓을 뿐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농아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근심 걱정이 반찬이라면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6번 유형(공포와 싸우는)이었는데 끊임없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자신의 불안을 가족들에게 쏟아 놓고 있었다. 딸은 어떤 말을 하려면 먼저 엄마의 얼굴부터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딸을 향해 또 다시 공박하는 그녀의 모습을 자신이 먼저 바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의 대화도 잘 들어 보면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있을 뿐 상대의 말을 결코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이미 입력된 정보 안에서만 들으려고 할 뿐 그 이상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예 듣지 못한다. 진실의 차원에서 보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수다쟁이야말로 벙어리이다.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갈등을 겪는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벙어리이다. 남의 말을 가로채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벙어리이다. 하나님께 기도의 말문이 막힌 사람은 영적인 벙어리이다. 나의 깊은 진실을 감추고 서로 믿지 못하면서 껍데기로만 만나는 인간관계 역시 서로가 벙어리의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말은 바르게 듣고 바르게 말해질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치료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가 하신 일은 눈 먼 자 보게 하고 말이 막힌 자 말하게 하고 앉은뱅이 일어서게 하는 일이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들과 세상을 고쳐주시는 일을 하셨다. 에니어그램 수련을 하고 난 소감들을 보면 모두 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회한과 그 사슬에서 벗어난 기쁨을 토로하고 있다. 산천초목이 다 말하고 있고 하늘과 땅이 다 말하고 있어도 인간은 그 말을 알아듣는 귀가 먹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마가복음에는 벙어리를 고치신 예수의 치료방법이 나오고 있다. (마가 7:31-37) 그 내용은 첫째 벙어리를 군중에서 따로 불러내는 데서 시작 된다. 귀먹은 인간의 치유를 위한 시작은 군중적인 삶의 방식과 공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일거리들과 걱정근심에 쌓여 살다 보면 어떤 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먼저 군중과 떨어져 예수와 함께 보내는 치료의 시간이 필요하다. 예수는 귀 먹은 이를 따로 불러낸 다음 그 두 귀에 손가락을 집어 넣으셨다 . 두 귀를 막아보라 그러면 소음들이 차단 될 것이다. 우리는 참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잡음들을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속 사회를 살다 보면 들려오게 되는 온갖 번민과 투쟁의 소리들을 차단하고 하늘의 소리를 나의 내면에서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때 비로소 밖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안에서 귀가 열려야 밖의 귀도 열리게 된다. 인정받지 못할 까봐, 거부당할 까봐 아예 귀를 막고 살아온 환자의 귀에 예수는 두 손가락을 집어 넣으셨다. 그 다음 예수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대셨다. 그것은 친밀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동작이다. 아이가 다쳤을 때 엄마가 호-하며 침을 발라 주듯이 환자의 불안한 마음을 신뢰로 바꾸어주는 따뜻함이다. 어떤 번역에는 “환자의 혀를 붙잡으셨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유창한 말을 그치고 침묵하도록 하셨다’라고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실뿌리 하나에 잎사귀 하나라는 말이 있다. 자연은 그렇게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침묵의 힘은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만 유창하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침묵에 대한 소중한 통찰을 제시하는 삐까르는 그런 말은 소음이라고 규정한다. 말이 소음으로 전락하게 될 때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라디오와 같은 소음기계로 전락하게 된다는 통찰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고요한 침묵을 찾기 시작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진다.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혀가 풀려진다. 평화와 기쁨은 그런 이들의 것이다. 치료의 과정 중에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 벙어리의 치료 과정은 기도로써 하늘을 여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언어의 분명함, 삶의 분명함은 인간이 하늘을 볼 때 부터이다. 예수를 만나 치료 받은 인생이 된다는 것은 내 머리 위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뜻한다. 생명의 감각이, 가슴이, 영혼이, 나의 모든 삶이 총체적으로 열려지게 됨을 뜻한다. 예수는 그 환자에게 한 숨(신음)을 내 쉬셨다. 그 한숨은 그 사람을 향한 깊은 신음이었다. 그것은 온 힘을 다하면서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애통의 한숨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구원의 말씀을 그에게 주셨다. “에바타 (열려라)” 그의 귀는 열린 귀가 되었다 그의 삶은 열린 삶이 되었다. 그의 가슴도 열려 이웃을 향해 열리게 되었고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는 큰 가슴이 되었다.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비를 주시는 하늘 아버지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