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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서리공동체  '유진'님의 어머니가 남긴 기록. 
[한겨레가 만난 사람] ‘영세중립평화통일론’ 회고록 낸 이남순씨
한겨레 김경애 기자기자블로그
» 초여름 녹음방초가 만발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한 지인의 꽃밭에 선 일선 이남순씨의 표정이 구순을 앞둔 고령을 잊게 할 만큼 해맑다. 남과 북을 모두 껴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천명으로 깨달은 이래 30년 넘게 명상과 기도의 삶을 실천해온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몸도 마음도 정신도 평화로워 보였다. 김경애 기자
“때가 왔어요.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어요. 그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깨닫게 하는 것이 내 소명입니다.”

올해 나이 88살, 그의 몸집은 왜소했고 백발은 성성했지만 목소리는 쨍쨍했다. 그가 2006년 영구귀국해 서귀포의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소식은 애초 알고 있었지만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부친과 자신과 자녀들로 이어진 가족 100년사와 스스로 천명으로 깨달은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론’을 정리해 최근 440쪽짜리 두툼한 책을 펴냈다. ‘북으로 간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의 딸 이남순의 영혼의 회고록’이라는 긴 부제를 내건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정신세계원 펴냄).

그는 지난달 20일 에미서리(국제영성지도력센터)의 한국본부가 있는 제주시 조천읍 조이빌리조트에서 조촐한 출간기념회를 열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1년 뒤 귀국해 제주에서 에미서리 공동체를 개척하고 있는 막내아들 박유진씨와 마샤 보글린 부부, 출간을 축하하고자 미국에서 건너온 둘째딸 김반아(은명의 새 이름)씨와 함께 1박2일에 걸쳐 그는 왜, 지금, 제주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지 들려줬다.

-책의 제목부터 범상찮네요. 평화의 철학이나 방법 같은 것을 소개한다는 게 아니고, 스스로 평화가 됐다니, 다른 깊은 뜻이 있나요?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에는 긍정과 부정의 에너지가 있지만, 긍정의 에너지, 사랑이라야 생명을 키울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면 무엇이든 잘하잖아요. 바로 신(神)이 드러나야 창조가 이뤄지는 것이니, 내가 신나고 평화로워야 남을, 그리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살아온 길도 되돌아보니, 그 모든 파란과 고난의 여정이 영성을 깨우쳐 나를 평화운동에 쓰이게 하고자 예정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생의 가장 큰 전기가 ‘아버지의 월북과 27년 만의 상봉’이라고 쓰셨듯이, 아무래도 그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아버지가 일찍이 서울에서 작은댁 살림을 했던 까닭에 12살 때 상경해서 여학교에 입학한 뒤에야 함께 살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6년간 밥상머리에서 받은 아버님의 가르침, ‘인류동포 세계일가’라는 대동사상이 내 지적 자산이자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론의 뿌리이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왜 홀연히, 한때 조선 최고였던 부와 그 많은 식솔들을 버린 채 북으로 가야만 했는지는 내 인생의 의문이자 숙제였어요. 1948년 늦가을 북아현동 우리 집을 갑자기 찾아와 뜰방에 선 채로 ‘나는 이제 먼 길을 떠난다. 잘들 있거라’ 한마디만 남기고 가버리셨어요. 그래서 캐나다 시민권을 받자마자 백방으로 아버지 생사를 수소문하다 74년 <통일신보>에서 ‘리종만’ 이름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이듬해 9월 평양을 방문해 91살로 생존해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 3박4일간 한방에서 얘기만 나누며 지냈어요. 그때 깨달았지요. 진정으로 염원하면 기적 같은 일이 이뤄진다는 것을.”

-그때 아버지가 자진 월북한 이유를 확인했나요?

“늘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대동주의자였어요. 다만 이상향으로 구상했던 농촌공동체의 실현이 당시로서는 사회주의 체제인 북에서 더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신 것 같아요. 북에서 산 29년 동안 아버지의 이력은 자세히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래서 회고록에 <대동일람 서문> <대동교학회 취지서>를 담아 아버지의 대동사상과 실천적 삶을 세상에 제대로 널리 알리고자 했어요.”

명상 통해 ‘영세중립=공존’ 깨달아
부친 ‘인류동포’ 대동사상서도 영향
민중·마음 중심의 힘으로 통일 꿈꿔

-79년 부친 묘소 참배, 95년 애국열사릉에 이장된 묘소 참배, 2007년 둘째 딸과 함께 부친의 다큐멘터리 제작 등등 모두 4차례나 북한을 다녀왔습니다. 영세중립평화통일론 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첫 방문 때인 55살 무렵 갱년기가 겹쳐 건강이 몹시 나빴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고 그 뜻을 확인하고 나니 남북통일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사명이 생겼어요. 작은댁 자손까지 9남매 중에 나만 아버지를 상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런 의지와 귀인의 도움 덕분에 몸도 곧 회복됐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친북 성향의 동포단체에 참여해 정치활동에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애초 내가 방북을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내 가족은 물론 한국의 형제들까지 논란이 분분했고 끝내는 골이 깊어져 반목하게 된 적도 있었어요. 공부를 끝낸 뒤 한국에 돌아와 일을 할 계획이었던 맏아들은 거의 절연의 편지를 보냈고, 둘째 사위는 ‘이혼 불사’를 내걸 만큼 반대가 심했죠. 그야말로 남북 분단의 갈등이 고스란히 우리 집안에서부터 풀어야 할 과제가 된 것이지요. 내게서 시작된 과제가 가족, 한인사회, 남북한, 전세계로 그리고 끝내는 우주적 차원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를 기둥 삼아 모두가 함께 공존하고 화합하는 길이 무엇인지 쉼없이 명상한 결과가 바로 ‘영세중립’입니다.”

-이제는 그런 갈등이 풀어졌나요?

“이 또한 예정된 섭리가 아니었나 싶은 게, 내가 먼저 풀었다기보다는 아이들이 내게 길을 안내했으니까요. 특히 막내 유진이 옥스퍼드대 시절부터 에미서리(빛을 전하는 전령들) 운동에 심취하면서 나 역시 영적 세계에 관심이 생겼고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지요. 유진은 결국 박사 과정을 중단하고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국제본부로 들어가 세계적인 영성 리더십 지도자가 됐고 둘째 반아도 에미서리를 거쳐 감성치유 전문가로 성장해 이제는 모자모녀 관계를 넘어 도반의 길을 함께 걷고 있어요. 그 과정을 되새겨보니 놀라운 깨달음이 숨어 있었어요. 개인끼리든 사회든 민족이든 ‘마음의 통일’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수행과 인연은 환갑 넘어서부터였는데, 자랄 때나 젊은 시절에는 어땠나요?

“어릴 때부터 ‘예지몽’을 꾼 적이 많았어요. 여섯살 무렵 꾸었던 ‘승천하는 용꿈’은 지금도 기억하는데, 어머니가 내게 유독 살림이나 바느질 같은 여자로서 해야 할 일을 시키지 않은 이유하고도 관련된, 내 운명의 상징 같은 영상이에요. 남편과 사별한 뒤, 제주도에 정착하려고 할 때처럼 어떤 중요한 결단의 고비엔 늘 선몽을 꾸곤 했으니까요. 또 체구는 작았지만 유난히 겁이 없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6·25가 터졌을 때 마침 남편은 일본에 있어서 혼자 시부모님과 아이들, 조카까지 7명의 피란살림을 꾸려냈어요. 처음엔 인민군에 끌려가 제자들 앞에서 인민재판을 당한 적도 있고, 수복 뒤엔 부역했다는 누명을 쓰고 형무소에 갇혔다가 총살의 위기도 겪었지만 두렵지는 않았어요. 또 64년 마흔 중반에 브라질 이민을 떠날 때도 남편은 마무리할 일이 있어 남고 나 혼자 4남매 데리고 먼저 가서 정착을 했는데, 그 용기와 힘이 어디서 났는지 신기할 정도였지요. 그나마 받기로 한 돈을 사기당해서 겨우 400달러를 들고 갔는데, 난생처음 해보는 육체노동에도 곧잘 적응했어요.”

-자녀들에게 더 넓은 세계에서 큰 꿈을 키우게 하려고 이민을 결행했다지요? 80년엔 캐나다 한인회에서 ‘장한 어머니상’도 받았으니 성공을 한 셈이네요.(큰딸은 캐나다 라발대학 인류학 박사로 캐나다연방정부 공무원이고, 하버드대학 교육철학 박사인 둘째딸은 미국에서 감성치유와 ‘함께 창조’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장남은 하버드에서 사회학 박사를 따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학교수로 있고, 막내아들은 캐나다 한인 최초로 영국 왕실의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퍼드 대학원을 나왔다.)

“이민선이 60일 동안 동남아시아~인도양~대서양으로 돌아간 덕분에 아이들이 덤으로 세계일주를 경험했어요. 그래서인지 낯선 환경에서 모두들 꿋꿋하게 제 몫을 잘해줬어요. 이번 회고록도 자식들 덕분에 가능했어요. 큰아들 세진은 브라질 이민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써온 내 일기와 가계부를 스캔해서 스크랩해줬어요. 모두 3천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죠. 책에 네 아이가 저마다 생각해온 나에 대해 솔직한 글도 써주었는데 그저 고맙고 감동스러울 따름이지요.”

북한 불행한데 남한만 행복하긴 힘들어
봉쇄·보복·증오로 대응하면 파국 가능성
‘천안함 대립’ 심한 지금 평화 얘기해야

-개인의 영적 평화가 어떻게 남북통일로 이어지는 걸까요?

“너의 행복 없이는 나의 행복이 있을 수 없어요. 나와 내 자식들이 저마다 행복해야 온 가족이 행복해요. 마찬가지로 같은 민족의 반쪽인 북한이 불행한데 남한만 행복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내 통일론의 핵심은 민중 중심의 통일이고 마음의 힘으로 이루는 통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깨어나야 하고 바로 서야만 합니다. 서로의 진심과 진실을 토대로 하지 않는 한 그밖의 어떤 노력도 모두 헛된 것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천안함 사태로 그 어느 때보다 적대적 대립이 심해지고 전쟁 위기설까지 나도는 요즘 한반도 상황을 보면 평화와 통일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 듯한데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바로 평화를 얘기해야 할 때입니다. 자칫 단절과 보복과 증오로 대응하면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발상을 뒤집어서 대화와 이해와 관용으로 지혜롭게 이 갈등을 풀어내면 전화위복의 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의 전기를 이룬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해요. 나는 학문을 한 사람이 아니니 그 근거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내 영적 안테나에서 자꾸 신호가 오고 있어요. 그래서 날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신호가 대통령에게 전해지기를, 내 회고록을 꼭 직접 읽어보기를 기도하고 있지요.”

-그런데 서울이나 고향이 아니라 제주에서 둥지를 튼 특별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내 마지막 용꿈은 제주에 ‘평화와 치유의 공원’(힐링가든)과 ‘국제 영성교육센터’를 열어 남북의 평화통일, 세계평화의 못자리 구실을 하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동 평화세계를 꿈꾸었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고 하늘이 내게 부여한 소명이라고 믿으니까요. 평화통일을 이루게 되면 우리 한민족은 분명 웅비의 새 세상을 주도하게 될 테니까요.”

-그 꿈을 이룰 구체적인 계획은 있나요?

“내가 깨닫고 실천해온 12가지 덕목을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큰절 100배를 하며 기원합니다. ‘가정은 자아완성의 학교이며 세계평화의 못자리다. 대동의 꽃은 대자아의 활연한 심경에서 피어난다. 개인과 민족의 운명은 천명이니, 여기에 인생의 답이 있다. 한민족은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을 이루고 도덕 선진국으로 웅비한다….’ 이산가족은 물론이고 남북 동포들의 소망은 다 같은 것이니, 갈라져 살지 말고, 서로 싸우지 말고, 모두 하나가 되어 다 같이 사이좋게 살기를 염원합니다. 그것이 내 계획의 전부입니다. 뜻이 닿을 때까지.”

-끝으로 통일시대를 맞이해야 할 젊은 세대에게 한말씀 해 주십시오.

“100% 긍정하는 마음을 지니길 바랍니다. 그러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이뤄집니다.”

인터뷰/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 이남순은


» 2007년 4번째 방북 때 평양 애국열사릉의 부친 묘소를 참배한 이남순과 둘째딸 김반아(오른쪽)씨.
1922년 현재 울산광역시인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 바닷가 마을에서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나 12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동덕여고를 거쳐 일본여자대학 사범과를 졸업하고 44년에 돌아와 해방 전까지 모교에서 육아과목을 가르치다 그해 여섯살 많은 박상철씨와 결혼했다. 호남 명문가 자손으로 도쿄제대 공학부를 나온 수력기계 전문가였던 남편과의 사이에 옥경·은명(반아)·세진·유진 2남2녀를 두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편의 사업을 돕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의 혼란기를 겪은 뒤 64년 브라질로 이민을 했다. 맨손으로 떠나와 4년간 재봉사로 일하다 68년 캐나다로 재이민해 38년간 살았다. 84년 남편과 사별한 뒤 토톤토에서 지내다 2006년 84살 때 영구귀국해 제주도에 정착했다.

그는 50대에는 캐나다 한인사회를 무대로 사회주의 성향의 통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환갑 무렵인 80년대 초반 영성공동체인 에미서리와 인연을 맺은 이래 영적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평범한 주부이자 어머니로 살던 그가 중년 이후 거듭 극적인 반전을 하게 된 전환점은 75년 평양에서 이뤄진 ‘27년 만의 부녀 상봉’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금광왕이자 대동주의자였던 이종만씨다.

■ 이남순씨 부친 이종만은


» 1975년 9월 첫 북한 방문 때 ‘27년 만에 상봉’한 아버지 이종만(왼쪽)과 막내딸 남순(오른쪽)씨.
1885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병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문물을 깨쳤다.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부터 사업을 시작해 대동광업주식회사를 만들어 광석 채굴에 나섰으나 실패를 거듭하다 30년 만에 27전28기, 53살에 조선 제일의 금광왕이 됐다. 36년 금강산 부근 장진광산에서 조선 초대의 금광개발권을 확보하고 기존의 영평금광을 매각해 155만원(현재가치 1500억원대)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는 그 가운데 80만원을 사회에 환원한 통 큰 씀씀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50만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를 설립하고, 개인 소유 토지의 소작료를 기존의 절반인 3할만 받기로 했다. 대동공업전문학교(지금의 북한 김책공업대)·대동광산조합·대동출판사 등으로 ‘대동콘체른’을 만들어 대동세상의 이상을 실천에 옮겼다.

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러 갔다가 북에 남은 그를 두고 김일성은 ‘애국적 기업가’라고 치하했다. 이후 광업부 고문으로 자원개발에 기여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77년 93살에 타계한 그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