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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편지 / 비워야 누리는 신비

2011.05.03 15:17

가온 조회 수:1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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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편지 / 비워야 누리는 신비

 

드디어 그 길을 갔습니다. 꽃눈이 풀풀 날리는 봄날이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날,

차 안에서만 보아 온 그림 같았던 호반(湖畔)의 산책로..

 

언젠가 꼭 전동휠체어로라도 그 길을 산책하겠노라는 바람이 이루어진 날,

나는 하늘과 호수를 배경으로 뻗은 꽃가지 등 봄날의 정경들을 디카에 담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뭐든 카메라에 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생겼고,

그래야만 소유했다는 포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달(?)을 하는 삶이라면 우리가 늘 지향하는 평안을 추구하는

삶이 될 수는 없지요.

메모 하는 습관도 이점은 있지만 그 순간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잃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해 많은 순간들을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프로그램에서 마치 취재를 온 기자처럼 계속해서 필기를 하는 이들처럼,

나 자신 역시 자료를 위해 메모를 하므로 그 순간조차 business 일 때가 많았습니다.

 유익한 것들이 모두가 편한 것은 아니며,

편리한 시스템이라고 해서 정신적인 여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 모든 게 발전하여 편해지는 만큼이나 정비례하게 복잡해져서

기계적인 면으로 영민하지 못한 나는 때로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급히 전화를 한다고 TV 리모콘으로 번호를 누르기도 하고,

무선전화기를 TV에 대고 채널을 맞추는가 하면,

TV 모니터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컴퓨터 마우스를 사용하기도 하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TV 리모콘으로 채널을 맞추느라 헤매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에는 완벽하게 좋은 것이란 없습니다.

얻는 분량만큼이나 정비례하게, 아니 오히려 그 보다 더 자신도 모르게

잃어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많은 것을 가진 자가 영혼의 기쁨을 추구했을 때(눅12:15-21)

그 분은 높아질 때 낮아지고 낮아질 때 높아지는 신비를 가르치셨습니다.(눅14:11)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주위에서는 늘 염려를 하곤 합니다.

목적은 좋지만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산이 나온 일이라면 이미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티끌처럼 작아지고 땅 끝까지 낮아진다 하더라도 구태여 계산하고 헤아릴 필요 없이

평안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참 신앙살이가 아닐까요.

 

커다란 날개로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도 있지만

날개를 탓하지 않고 작은 날개로도 부지런히 나는 꿀벌도 있습니다.

 

평생 독수리나 갈매기처럼 큰 날개로 활개 치며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작은 날개지만 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잉잉거리며...

아, 어쩌면 나는 꿀벌처럼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확신만 있다면, 아니 공명할 수 있도록 마음만 비울 수 있다면

날개가 없어도 민들레홀씨처럼 섭리의 훈풍을 타고 더 가볍게 날 수 있지 않을까요?

 

참으로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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