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가슴을 따르는 사람들
2010.06.29 09:43
하나님의 가슴을 따르는 사람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공포와 전율’이라는 그의 저서 제목으로 신앙의 본질을 은유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지시를 받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했고 조건 없는 ‘예스’를 하고자 했다. 그는 백 살에 낳은 자식을 바치는 공포와 전율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슴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가슴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믿음 안에서 행동했다.
그가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여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주의 천사가 말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일을 하지 마라” 그는 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바쳤고 이삭은 풀려났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통하여 주에 대한 경외심과 순종이 입증되게 되었다. 또한 이삭 역시 믿음의 완성인 철저한 순종과 긍정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자식이 부모의 열매라고 한다면 자식 농사를 제대로 했다는 것을 이삭은 보여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은 예수에게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모리아산의 제단이 지구의 제단인 골고다로 바뀌어졌을 뿐 공포와 전율의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는 이삭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따랐지만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는 산 제물로 ‘스스로’ 바쳤다는 점이다. 이삭은 상황에 순응하여 따라갔고 예수는 자신의 의지를 세워 제물의 길을 걸어갔다.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론의 모습일 뿐이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것이었다. 그 결단과 헌신과 순종이 십자가의 내용이다. 그런데 오늘의 크리스챤들은 예수의 결단과 헌신과 순종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빛에만 눈을 돌리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일까. 진리는 내 자신과 연결 되어 육화 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구르지에프는 거짓 인성에서 깨어나 참된 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애벌레가 고치를 짓듯이 수련 인성이 있어야 한다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고치의 과정 없이 신념의 차원에서 나비가 된 양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건만 자신의 십자가는 팽개친 채 헛꿈만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는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미 부활의 사람이었다. 공포와 전율의 십자가를 받아 드리고자 선택했을 때 생사를 초월하게 되었다. 예수의 소년시절에 대한 기록에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가 2:49)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피는 오늘 여기에서 예수처럼 하나님의 가슴을 따르고자 내 가슴의 뜻을 내려놓는 사람들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만 한다. 나도 인류의 짐을 지고가신 예수처럼 최소한 이웃의 짐이라도 서로 나누어 질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할 때 하늘 아버지의 뜻에 ‘예’ 할 수 있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빛의 비전을 주신다.
이현필선생은 예수의 피를 직접 찍어 바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피의 진실이 내 가슴에 임할 때 구원을 받는 다고 말했다. 어떤 순종도 헌신도 진리에 대한 열정도 없이 자기 에고에 갇힌 사람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비켜가게 될 것이다. 사망과 의심, 두려움을 떨치고 생명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하는 헌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그의 빛으로 ‘나의 나됨’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 무엇들을 위해 살지도 않고 나 아닌 것들을 나로 착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배우라. 너희 영혼이 쉬게 되리라. 나의 멍에는 가쉽고 나의 짐은 가볍도다” (마태 10:7-8)
예수의 멍에는 빛의 멍에이며 생명과 진리의 멍에이다. 이 말씀은 예수의 옷은 내가 입어야 할 옷이며 그의 역할은 나의 역할임을 뜻한다. 예수는 복음을 전했다. 병든 자를 고쳤고 죽은 자를 일으켰다. 그를 만난 자는 빛의 존재, 새로운 존재와 삶으로 부활했다. 이 부활의 은혜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나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그 증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힘과 그리스도의 지혜와 성령의 사랑으로 임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이 은혜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그를 현저히 욕보였다. (히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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