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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권을 지켜주었어야 했다 


                                                    한 정 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봉하마을에 문상을 하러 간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이 깊지 않고, 그가 대통령 재직 당시 취한 몇몇 정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열혈 지지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그가 퇴임한 후 고향에 정착해서 모심고 도랑 파며 희한하게 생긴 유모차에 손자손녀를 태워 자전거로 끌고 동네방네 마실을 다니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는 ‘좀 짱이네’ 하고 생각했었다. 그는 권력을 손에 쥘 줄도 알지만, 진정 어떻게 권력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 옛 로마에 루키우스 킨킨나투스(신시나투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집정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농촌 마을 오두막에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이민족이 침입하자 로마인들의 간청으로 비상대권을 손에 쥔 독재관이 되어 적과의 대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적군을 항복시킴으로써 임무를 완수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대권을 던지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미국의 신시내티라는 도시 이름이 그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 하던가.


고향 마을의 현인으로 되돌아간 킨킨나투스처럼, 노 대통령도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미련 없이 낙향했던 것이다. 권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여길 줄 아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기에, 이것이 반가웠다. 나는 노대통령에게 그 목적이란,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그리고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의 화해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역사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또한 과거사 정리작업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정치인으로 남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그는 잠겨 있던 문서고의 문을 열어, 식민지 권력 혹은 국가폭력에 의한 사회구성원의 부당한 희생 사례들을 되살피고 이를 규명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국가의 대표자로서 희생자 혹은 유족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할 줄도 아는 대통령이었다. 역사의식이 있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서거 당일 밤에 대한문 앞 분향소에 문상을 갔던 데 이어, 오늘 다시 몇 시간 밤길을 달려 서울에서 봉하까지 내려가고자 하는 것은 이것 말고도 많았던 그의 긍정적인 면모에 대한 찬양의 심정 때문이 아니다. 그가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지도자로 평가받을 인물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라면, 다른 조문객들도 차고 넘칠 텐데 나 정도야 사이버 조문만 하고 슬쩍 빠져도 어쩌면 그만일 것이다.


내가 그의 사후에 황망하게 몇 번씩이나 문상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나는 그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이래 소수의 핵심 지지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비판 받으면서 극도의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특히 언론 보도 행태를 보면서 격분했었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적어도 노 대통령이 자기 집에서 돈을 빌려 썼다는 고백을 내놓았던 4월 7일 이후에는 노무현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집단 고문, 집단 가해에 빠져든 사회였다. 거의 모든 언론이 실체 없는 의혹만으로 온 지면과 뉴스 시간 전체를 싸발랐고 극단적 인격폄하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처음부터 노무현 죽이기에 앞장섰던 보수언론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진보언론도 노대통령 의혹 보도에서는 가혹한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는, 진보는 자기편이라 해서 ! ! 부패 의혹을 봐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에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그것은 당혹스러운 딜레마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선정주의의 작용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사회 모두가 노무현과 그 측근들에 대한 봉건적 ‘삼족지멸’의 징벌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를 보고도 그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내지 못했다. 지인들에게 울분을 토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노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언론보도 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끝내 발표하지 않은 채 컴퓨터 파일로만 묻어 두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두려움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보도되는 수사 내용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의 주변 전체가 돈 문제를 둘러싼 의혹에 싸여 있는 것은 사실이고, 어쩌면 그 자신도 도덕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법률 지식에 밝은 변호사 출신 정치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차츰 질질 끄는 수사에 지쳐갔다. 만의 하나, 그가 도덕적인 면에서 흠결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현실정치에 합당한 평가를 받으면 될 뿐이고, 온 사회! ! 가 그것 때문에 장자연 사건이며, 전쟁위협을 포함하는 대북정책 위기며, 용산참사며, 노동문제며 모두 덮어 버리고 그 한 사람을 매도하는 데 열을 올려도 좋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소리쳐 말하지 못했다. 한 인간이 두 달 동안 인권을 박탈당한 채 생가죽을 벗기는 것 같은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저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새디즘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 것을 겪으면서도, 그의 극단적 선택이 보도되기 전까지 계속 미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검찰이, 그리고 그에게 적대적인 언론이 노렸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한 개인을 인권을 지켜줄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 아감벤이 말했던 것과 같이 법의 보호 밖으로 밀려 나 있는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지속적 공격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판단력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


내가 몇 시간 밤길을 달려가 조문을 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대로 다시 몇 시간 새벽길을 달려 상경해야 한다는 이 수월치 않은 여정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그의 영전에 문상을 가려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처절하게 짓밟히는 존재가 되어 있던 순간에, 그가 사회 구성원 누구나 마구 욕하고 조롱하고 무섭게 경멸해도 무방한 희생양이 되고 있던 순간에, 그래서 이 사회가 온갖 대내외적 난제들을 덮어버리고 은폐해 버린 채 그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그 순간에, 이것이 부당하다는 공개적 발언을 끝내 하지 못했던 데 대한 후회와 자책, 그리고 미안함.


(5월 26일 밤 아홉시 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