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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편지 / 상 처

 

정신지체를 공동체 가족들은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종종 티격티격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이들이 다투는 이유는 함께 찬송을 부르는데 "...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라는 찬송의

'고초'를  진선이 자꾸만 '고추'라고 하는 게 신경이 걸려 병만이 불평을 하자 자존심이 상한 진선도 늘

찬송 절수를 혼동하는 병만의 약점을 꼬집습니다.

 

같은 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서로 부족한 면을 지적하면서 상처를 주고받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약점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상처를 받았던 그 말로 다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다는 데에 있지요.

 

특히 이들이 '바보'라는 말에 서로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분을 내는 이유는

살아오면서 받아왔던 열등감 때문일 것입니다.

 

지체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면서 나 역시 한창 예민했던 시절에 병든 몸을 가리키는 '병신'이란 말이

신문에라도 가볍게 사용될 때면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아 주필에게 편지를 써서 따질 정도였지요.

 

이들이 티격거리는 이유가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때문이 아닌 것은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허물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보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20여년전, 장애인 신앙수련회를 가졌을 때, 봉사차원에서 참여했던 비장애인 한 분이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흥에 겨워 춤을 추다가 갑자기 바가지를 등에 넣고 다리를 구부리더니

신나게 춤을 추며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장애를 가진 이들이 상처를 받고 분개했고, 그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으며 그 중에는

울며 나가는 자매도 있었습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장애인을 위한 수련장에서 그런 행동은 분명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한

실수였지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상처가 난 부위에 치료의 기운들을 보내

진액으로 감싸주고 새살이 돋게 하므로 살림의 질서를 이루어 가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우리는 상처를 감싸주기보다는

오히려 더 아프게 할 때가 있음을 인간 된 소치로 고백합니다.

 

상처를 주는 죽임의 행위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상처가 될 상황들도

전다형님의 시 ‘청어를 굽다’에서처럼 가시를 발라가듯이 발라가며 부드러운 속살과 사랑만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라고 부르는 찬송처럼 날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삶이라면 그러한 상처는 오히려 자신을 성화시키는 밑거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바람처럼 가슴을 통과하여 지나가게 함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리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아프리카의 라코타 족속의 사냥꾼들은 튼튼한 활을 만들기 위해 벼락 맞은 양물푸레나무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나무는 희귀했지만 가장 힘겨운 고초가 가장 강한 힘을 낳는 까닭에 라코타 전사들은

그런 나무를 최고로 쳤다고 합니다.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

 

아직 봄은 멀었건만 멀리 보이는 나뭇가지 끝에는 움이 돋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