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되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
2011.05.11 23:07
집으로 가되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마가복음 8:22-26) |
정진우 목사(서울제일교회 ) |
프랑스의 어떤 시골 사람이 오랫동안 그리던 루브르 박물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촌 사람이 생전 처음 만나는 진기한 유물들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 해설하는 사람에게 너무 꼬치꼬치 물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우산대에 우산을 꽂아 놓은 것을 보고도 “이게 누구 겁니까?”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안내자가 조금 짜증이 날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귀찮아서 “그건 나폴레옹이 쓰던 겁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 다음 방에 한 유리 상자에 해골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조금 크고 하나는 조금 작은 것이 나란히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그 시골 양반이 물었습니다. “이게 누구 해골입니까?” 해설자가 이번에도 “나폴레옹 것이지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시골 양반이 그럼 그 옆의 작은 해골은 누구 것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짜증이 난 해설자가 “그건 나폴레옹의 어릴 적 해골입니다.”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해골을 어릴 적 해골과 성인된 해골 두 개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순 억지 주장입니다. 넌센스이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부활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 그건 순 억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모순이요 넌센스이지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우리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는다고 오늘 이런 부활절을 유난스럽게 지키는 것입니까? 부활절 꽃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성가대 찬양이 특별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저자들이 혹은 부활의 증인들이 사기꾼이거나 지성이 모자란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그들이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그들도 부활이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줄 알지만, 그게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인 줄 알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경험 그들 스스로의 어떤 체험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경험이란 바로 그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난 삶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진, 예수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성으로는 그들의 상식과 논리로는 말이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들은 예수에게서 경험한 어떤 삶의 경험으로 부활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논리가 아닙니다. 부활론 천만마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단지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삶의 경험이며 체험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부활은 우리가 죽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난다거나 천국에 간다거나 하는 그런 사후 세계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부활이란 오늘 우리가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며 삶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먼 자에게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 나중에 낫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배고파 죽을 지경의 사람에게 부활이란 밥입니다. 지금 눈먼 자에게 부활이란 눈을 뜨는 것이고 지금 벙어리로 사는 자에게 부활이란 혀가 풀려 소리쳐 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앉은뱅이에게 부활이란 껑충껑충 뛰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눈먼 자가 눈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그분이 경험한 것은 단지 보게 되었다는 육체적 변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 온전한 인간 사람의 참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단지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부활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이들의 이야기는 다 부활 이후에 보도들로서 성경이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그냥 기적적 치유를 받은, 의료보험도 한 푼 안내고 병원비도 하나 들지 않고 예수 만나 공짜로 병 고침 받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살게 된 사람들, 부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고 배워야 하는 진실은 그저 어떻게 하면 횡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부활을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경험한 그 삶의 변화를 이런 말로 맺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집으로 돌아가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마라.”여러분 보통 집은 어디 있습니까? 마을 안에 있습니까? 마을 밖에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마을 가운데 있지요. 그런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일요일 날 서울제일교회에서 만나자 그런데 오장동에는 가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서울제일교회에서 만나자는 것입니까? 만나지 말자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런 성경을 그저 술술 읽어지면 그것 정말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 예수 믿는 방식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서 걸려 넘어지고 괴로워하고 아파할 줄 알아야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회의하고 번뇌하고, 그게 신앙입니다.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다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정말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어쨌든 집으로 가되 마을에는 가지마라. 이건 넌센스지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지 눈을 뜨는 기적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된 부활의 증언인 것입니다. 그동안 그는 마을에서 눈먼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 마을의 질서 속에서 그는 사람도 강도 하늘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사람이 무엇이고 산과 강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를 눈멀게 한 그 마을의 질서가 무엇이었는지 길게 말할 자리는 아닙니다. 단지 성경은 그가 살아온 마을은 다시 가야 할 곳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를 눈멀게 한 무엇이 있지요. 오늘 성경은 아주 짧게 그가 벳세다 사람이라는 말로 암시하고 있습디다만 그 벳세다라는 말은 물고기를 잡는 집 혹은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말입니다. 베드로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그건 바로 제자들이 살아왔던 삶을 지칭하는 말이지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삶 그것을 눈먼 상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벳세다의 맹인은 잘못된 마을의 질서 그것이 율법체제일수도 있고 돈이 사람이 주무르는 질서일수도 있고 어부는 천한 일이라고 갈릴리 지역은 못된 인간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잘못된 편견과 통념일수도 있고 하여튼 사람과 강과 세상과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질서, 어떤 죽음의 힘이 지배하는, 편견과 통념의 질서, 그래서 우리를 병들게 하는 그런 모든 질서를 총칭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부활이란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그런 부활이란 바로 그 썩은 통념, 죽음의 힘, 눈멀게 하는 어떤 잘못된 편견으로부터 자유하는것임을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집으로 가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그래서 이제 다시 살게 된 그 삶은 이전의 눈뜨기 전, 부활하기 전 그 마을의 질서, 그 통념의 질서, 그 죽음의 질서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그렇게 이 세상의 가득 채우고 있는 통념의 질서, 죽음이 질서와 결별하는 것입니다. 마을로는 가지 말라. 집으로 가되 마을로는 가지 말라 부활한 사람들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분단 이데올로기가 이미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형제간에 총칼을 겨누고 서로를 잡어 먹을 듯이 노려보아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그 분단의 통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은 인간보다 열등하고 열등한 것은 함부로 그 생명을 경시해도 된다는 그 반생명적 통념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은 언제나 밖에 있고 그 적을 무찌르면 내가 편안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국가보안법의 통념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제 부활을 살려거든 진정으로 부활을 찬양하려거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그 마을의 질서, 그 도시의 질서, 그 세상의 질서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잘 살아가십시오. 예수 믿고 정말 우리가 부활을살고 있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인격으로 살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집으로 가되 마을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는 이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부활절이란 우리가 믿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사는 그 통념의 질서, 그 마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날이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부활하여 훨훨 새 인격으로 살고 싶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의존해 있는 그 마을의 질서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여러분을, 당신을, 눈멀게 하는 그 통념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나를 하나님의 아들딸인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인 이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눈멀게 하고 병들게 하는, 그 거룩한 책임을 방기하게 하는 그 잘못된 마을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그 죽음의 질서 반생명의 질서와 결별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부활의 참 생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꼭 한번은 그 마을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세상의 번잡한 이야기가 홍수처럼 흐르는 그 마을에서 벗어나 참 생명이 무엇인지 오늘 내 삶이 기초하고 있는 이 삶의 방식 오늘 이세계가 기초하고 있는 그 통념의 질서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새롭게 눈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제 부활했으니 어제의 통념의 질서, 편견과 미망, 오류와 아집의 마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에 손에 이끌리어 그 마을을 벗어난다면 분명 새 생명의 세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올해 부활절이 이 참 생명의 맛을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들 삶에 풍성하게 내리워지는 그런 은총의 기회를 되기를 바랍니다.
집으로 가되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오늘 부활한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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