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믿음 - 김홍한
2011.11.23 07:28
역사상 무모하고 황당하고, 잔혹한 행위 등이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수없이 자행되었다. 때로는 사악한 전쟁이 신앙의 탈을 쓰고 치러졌다.
우리의 신앙은 합리성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합리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합리적 이성에 의해서 검증 받아야 한다. 그것이 신학적 작업이다. 신학적 작업이 없으면 필경은 미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안타까운 믿음 1
1095년 3월 비잔틴(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유럽에 지원을 요청했다. 용병제공을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요청을 당시 로마교황인 우르반 2세는 정치적, 종교적 목적에서 적극 활용하여 십자군을 제창하고 나섰다.
“동방교회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이 여러분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슬람교도들과 아랍인들에게 영토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상스러운 종족들을 그 땅에서 몰아냅시다!”
민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거의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이 전쟁의 목적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에서 발생한다. 종교적 이유는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는 알지 못하고 종교, 혹 민족, 혹 이념에 선동되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십자군에 열광한 이들은 장자 상속제에서 밀려난 차남 이하의 귀족자제들이 자신의 영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열광했다. 또 가난한 빈민들이 새로운 땅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열광했다.
로마교회는 십자군 참전자 모두에게 고해를 면제해 준다고 했다. 연옥에서의 형벌도 면제된다고 했다. 사망하는 자의 영혼은 곧장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십자군 참전을 독려하는 설교자들의 설교에 민중들은 열광하면서 신비체험을 하기도 했다.
한편 떠돌이 설교자 피에르의 선동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빈민들이 몰려들었다. 정규 십자군이 결성되기 전에 이미 빈민들의 십자군이 형성되어 먼저 비잔틴(콘스탄티노플)로 출발했다. 그들의 원정은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소망을 찾아 떠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도무지 소망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십자군은 유일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빈민들이 가족과 가축이 함께 이동한다. 떠돌이 설교자의 뒤를 따라서 조직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율도 없는 대 이동이다. 그들에게 온정을 베풀어 준이들도 있었으나 워낙 많은 이들이 이동하다 보니 약탈이 자행되었다. 그들이 지난 곳은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가는 도중 무수히 많은 이들이 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사고로 죽었다. 어느덧 그들이 비잔틴에 도착했다.
그들의 맞이한 동로마제국은 심히 당황했다. 잘 훈련된 용병을 기대했으나 그들에게 온 이들은 거대한 거지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동로마제국은 그들을 수도에 들이지도 않고 서둘러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내 적지로 보냈다.
적지에 들어간 빈민 십자군들에게 천군천사의 도움은 없었다. 홍해를 가르는 듯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의 대부분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안타까운 믿음 2
- 성스러운 창과 불의 시련 -
1096년 1차 십자군 당시 툴루주 백작 레몽이 이끄는 부대에 바르톨로메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꿈에서 성스러운 창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성스러운 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으나 호기심에 그가 지목한 곳을 팠더니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녹슨 창이 발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창이 정말 성스러운 창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창을 앞세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창이 가짜라는 소리가 나돌기 시작하였다. 분노한 바르톨로메오는 그 창이 진짜 성스러운 창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불의 시련을 제안하였다. 마치 다니엘처럼 자신이 뜨거운 장작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음으로 그 창이 진짜임을 증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뜨거운 장작불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죽어 버렸다. 그는 그 창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는커녕 자신의 죽음으로 그 창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가 죽고, 그 창을 가지고 있던 툴루즈 백작 레몽도 죽었다. 성스러운 창의 진위가 흐지부지된 가운데 소위 성스러운 창은 4개로 늘어났다. 어디선가 주워온 녹슨 창을 성스러운 창이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인들은 성지근처에서 무수한 성물(?)들을 모았다. 그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나무들을 모으면 여러 수레에 가득 찰 정도다. 좀 오래된 술잔을 발견하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 사용하신 성배라고 우겼다.
안타까운 믿음 3
- 박관준 장로-
십자군 당시 바르톨로메오가 성스러운 창을 증명하기 위하여 불의 시련을 감행한 것과 비슷한 사건이 한국교회에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박관준장로는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조선총독에게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일본 동경에서 열리고 있는 종교법안심의 의회에 안이숙(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보성여학교 교사직을 사임)과 함께 갔다. 그는 주장하기를
“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며 그분의 섭리아래 인류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봉하는 나라는 그분의 축복을 받아 번성할 것이며 그를 섬기지 않는 나라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거든 하나님이 참신인지 아니면 천조대신이 참신인지를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 시험하는 방법은 나무 백단을 쌓아놓고 그 위에 나를 올려 앉히고 불을 질러서 내가 타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믿고 그 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일본의 신으로 믿고 섬기도록 하라.”
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용기이다. 참으로 대단한 자기 확신이다. 그는 갈멜산 산상에서의 대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사자 굴과 풀무 불 사건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그 사건이 그의 믿음대로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확신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신은 옳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자신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역대 순교자들은 옳지 못했던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일제가 박장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뭇단을 쌓고 그를 불태웠다면 그는 필경은 죽어 재가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는 - 박장로의 주장대로라면 - 하나님은 가짜이고 천조대신이 진짜라는 결론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그로 인하여 실망하고 낙담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이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신앙이다. 자기 확신이 하나님신앙을 대신한 것이다.
- 김홍한저, <REVIEW 기독교사>, 다산글방, 2005년, 240쪽.
안타까운 믿음 4
- 1666년 샤베타이 제비 메시야 사건 -
이 이야기는 기독교세계에는 거의 알려진바 없지만 유대교에서는 엄청난 사건으로 지금까지 큰 상처로 남아 있다.
샤베타이 제비는 1626년 스페인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공공연히 금지된 음식을 먹고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등 유대교 율법을 범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라고 믿었다. 1656년 유대교 랍비들은 그를 추방했지만 그는 오히려 유대교 율법의 폐지를 선언하고 창부로 지내던 여인과 결혼했다. 1662년 그는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두려움에 빠져서 당시 악령을 잘 쫓는다는 젊은 랍비 나단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샤베타이가 겪고 있는 고통은 그가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라 했다.
1665년 샤베타이는 메시야 활동의 시작을 선언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다수 유대인은 그를 지지해 몰려들었고 그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심판할 12명의 제자를 선발했다. 한편 랍비 나단은 팔레스타인 지역 외의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오스만 제국 내의 유대인들에게 서신을 띄워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했다. 메시야의 도래 소식은 수세기 동안 억압과 박해 속에 살아온 유대인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 유대교 역사를 통해 메시야라고 자칭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으나 이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은 이는 없었다. 혹 샤베타이에 대한 의혹이 있다 할지라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 대한 지지는 대단했다.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내적인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다. 그들은 모든 생업을 정지하고 그를 환호했다.
샤베타이는 1666년 1월 이스탄불에 들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감금했다. 비록 감금된 신세였으나 샤베타이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서신을 보낼 때도 “구세주 너의 신, 샤베타이 제비”라는 서명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샤베타이는 주저 없이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선택했다. 그리고 즉시 석방되었다. 그 후로 그는 오스만 제국의 연금을 받으며 충실한 무슬림으로 살다 1676년 죽었다.
샤베타이의 이슬람개종으로 유대인들은 경악했고 많은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앙을 포기했다. 당시의 유대 랍비들은 샤베타이에 관한 모든 문서를 소각하고 유대교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 버리려고 노력했으며 그 의미를 격하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일부 유대인들은 샤베타이의 이슬람 개종 후에도 그를 메시야로 믿었다. 그들의 구원 체험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베타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했다. 샤베타이는 이스라엘 구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어둠과 죄의 나락으로 내려가야만 했으며 그것의 과정으로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 터키와 그리스 지역의 유대인 200가구가 1683년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다.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은밀히 유대교에 충실했고 랍비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졌으며 서로의 집에서 예배 의식을 행했다. 오늘날에도 터키에는 여전히 작은 ‘돈메’(배교) 그룹이 있고 외면적으로는 흠 잡을데 없는 이슬람 생활을 하면서 유대교 신앙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신이 샤베타이를 통해 성육신 했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인이 믿는 메이샤 ‘예수’를 유대인들은 거부하고 처형했다. 반면 그들이 전폭적으로 메시야로 받아들인 “샤베타이 제비”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러나 아직도 샤베타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는 돈메그룹의 믿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김홍한저, <REVIEW 기독교사>, 다산글방, 2005년, 209~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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