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507741
  • Today : 1295
  • Yesterday : 806


기장은 분열이 아닌 쫓겨난 공동체"

2013.06.02 21:42

물님 조회 수:12406

     
"기장은 분열이 아닌 쫓겨난 공동체"
"교회 위기, 역사적 사명 잃은 데서 온다"
한국기독교장로회 60주년 인터뷰 시리즈 - 문대골 목사
2013년 05월 30일 (목) 19:10:38 고수봉gogo990@hanmail.net

53년 6월, 제37회 총회가 결정한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교역자 자격 금지',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 박탈 및 경기노회 제명', '축자영감설 부정한 스코트 목사 처벌' 등에 반발해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이 되었다. 그러부터 60년의 세월이 지났다. 기장은 60주년을 맞아 순례기도회를 여는 등 새로운 출발을 위한 또 다른 시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에 주요 인사들을 만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60년을 평가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는 기장의 전망과 방향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상계동 지역에서 생명교회를 개척해 공동주택 사업, 신협, 노동야학 등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25년 동안 꾸려온 목사님이 있다. 현재는 원로 목사로 함석헌 선생님과 관련해 글도 쓰면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아직도 가슴에는 교회와 역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이다.

바로 문대골 목사님이다. 이미 은퇴를 한 목사님으로, 기장에 대한 애정을 가진 특별한 이력을 가진 목사님으로 기장 60주년을 맞아 평가와 전망, 그리고 따끔한 충고를 들어보기로 했다.

 

   
 

함석헌의 사람, 감리교 목사에서 기장 목사로

장로회 목사로서 특별한 이력을 지녔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장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내가 기장에 가입한 것은 1977년이었다. 원래 소속은 예수교감리회였으며, 그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예감의 감독까지 지냈다. 교단의 감독이 되면 신앙고백, 문서 등 역사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감 감독이 되었을 때, NCCK 가입하기 위한 작업을 했었는데, 당시 김기동 목사님이 회장을 지내고 있었고, 간사로 있던 김관련 목사와 그 일을 도모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알려지면서 ‘감독이 교단을 팔아먹으려 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내부에서 싸움도 일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디를 가든지 함석헌의 사람으로 이야기되면서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인식이 살벌했고, 함석헌 선생님을 이단시 했던 때였다. 보수적인 신학 바탕에서 견딜 수 없어 고민하던 중에 함석헌 선생님이 가깝게 지내던 이준묵 목사님을 소개해 주었고 기장으로 오게 되었다.

기장으로 교단을 옮겼을 때,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내가 기장에 가입할 때 여섯 교회가 함께 가입했는데, 우리 교회와 한 교회만 남고 네 교회는 다 떠나버렸다. 가입 후 당회장권 취득을 위한 노회와 총회의 요구 사항이 많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신앙고백인데, 가입한 분들은 목사로 인정받고 목회하는 것에 관심했지 기장이 가진 역사적 신앙고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72년에 개척한 우리 교회는 가입할 당시 상계동에서 100여명이 아주 열심히, 뜨겁게 모이는 교회였다. 그런데 가입하고 보니 교회만 받고 담임권이나 목사는 안 된다고 하더라. 이미 목회를 하고 있었고, 감독까지 지냈는데 교회만 가져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결국 목사고시 12과목을 다시 치르고, 전임목회 2년을 지낸 후 82년도에 공식적인 기장 생명교회 담임목사가 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19세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 17세에 해병대에 지원해서 갔는데, 휴가 나온 날 함 선생님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무교회주의자 함석헌 구속되다’였다. 그때는 뭔지도 몰랐다. 나중에 안거지만 1958년, 6.25전쟁 8주년 기념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쓰고 감옥에 가셨다. 그 기사를 봤는데 가슴이 천둥치는 것처럼 뛰었다. 귀대 후에도 선생님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11월 초, 제대 전 휴가에 그 신문을 들고 함 선생님을 찾아가 만나 뵈었다. 그 후 단국대 야간 시절 선생님을 초청해 강연도 듣고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다. <씨알의 소리>를 처음 창간할 때 출판부장으로 있었고, 목회를 할 때는 계속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었다. 함 선생님도 나를 흐뭇해 하셨고, 나는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김재준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축복

 

   
 

기장 목회자로 30여년을 살아오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86년 겨울 전국선교대회를 제일교회에서 했었다. 박형규 목사님을 공산당이라고 해서 중앙정보부에서 계속 감시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던 때였다. 예배드리고 나오는 목사님을 깡패들이 폭행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때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이 룸살롱에서 칼 맞은 사람의 주소를 제일교회로 발표했었다. 당시 제일교회 아래층에 임대 가게들이 있었는데, 전경환의 프락치들이 박형규 목사님을 잡으려고 세를 얻어가지고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기자들에게 그대로 발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이로 인해 ‘전경환의 프락치들이 박형규를 잡으려고 한다’는 소리가 퍼지게 됐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나는 서울노회 사회부장이었는데, 사람들이 제일교회로 몰려들었다. 이미 그곳에는 경찰들이 모여 교회를 봉쇄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하고 들어가려 야단하고 있었는데 안에 있던 사람이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오는 놈은 죽여, 죽으려면 들어와!’ 그러더라. 그때 갑자기 든 생각이 ‘죽어서 들어갈 수 있다면 내가 한번 들어가야겠다.’였다. 전부 보는 가운데 철문을 타고 넘어 들어갔고, 쇠파이프를 맞고 병원에 실려 갔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전국교회에서 초청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총회 교사위원장을 맡기도 했었다.

또 다른 일화는 기장에 오기 전인데,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69)’를 조직할 때였다. 그 자리에 김재준 박사님이 왔고, 위원장까지 맡았다. 행사가 끝나고 나는 함 선생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가는 나가자마자 경찰들이 함 선생님을 끌고 갔다. 그런데 김재준 박사님은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경찰들이 아무도 김재준 박사님을 모르더라. 빙긋이 웃으며 뒤돌아보더니 조용히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많이 웃었다.
나중에 김재준 박사님이 원효로 함 선생님 댁에 오셔서 두 분 얘기하시던 것을 기억한다. ‘잘생긴 거 별것 아니야. 못생겼으니까 좋잖아!’ 그러시던 일도 있었다.

60주년을 맞이한 기장의 역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기장, 기장의 정신은 진정한 성서정신이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새롭게 변화된 체험을 자신의 신앙고백, 생활고백을 기록한 것이 성서이다. 완결된 것을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논리, 어떤 도그마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김재준 신학사상에서 싹터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기장은 성서정신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한국기독교에 제시를 했다고 생각을 한다.
적어도 기장이 있기 전, 기독교는 ‘목사님 잘못은 말하지 마라. 하나님이 다 심판을 하신다. 목사님 말을 무엇이든지 순종을 해라’였다. 또는 ‘세상의 것은 다 쓸데없는 것이다. 열심히 믿고 변화 받고 천국에 간다.’ 그것이 전부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몰랐지만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로 정통적인 종교가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국가주의와 쉽게 결합해 독립운동에도 기여했다. 그런 점은 좋았다고 본다. 그런데 비상시가 지나고 종교는 종교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국가주의와 결합했으며, 정권을 잡은 자를 어른으로 모시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정말 ‘하나님 앞에 서는 나’, ‘하나님과 나’ 그것을 제시한 것이 김재준이었다. 양심의 자유, 신학의 자유, 학문으로써 성서를 보는 눈이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성서를 새롭게 만나게 되고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장은 쫓겨난 공동체이지 분열한 공동체가 아니다. 기장은 기독교를 분열시킨 집단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다. 마치 그것은 유대교가 예수라는 인격을 만나 쫓겨난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예수가 유대교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듯 기장은 정말 구체제에서 쫓겨난 자들이다. 새것을 추구하는 종교 공동체인 것이다.
어떤 종교든 굳어지면 악마가 된다. 늘 굳어지면 깨면서 나사형처럼 계속 올라가야 새역사에 이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재준이 한국 기독교가 만났다 냈다고 하는 것은 축복이다.

 

   
 

교회의 역사적 사명 상실, 위기의 원인

그렇다면 오늘날 기장의 위기와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장의 위기나 기독교의 위기는 같은 것으로 본다. 총회 총대로 갔을 때였다. 3000교회운동이 선교 과제로 올랐다. 하지만 반대했다. ‘3000교회 운동’, 좋지만 선교 과제가 될 수 없었다. 적어도 기장은 그럴 수 없었다.
또한 ‘3000교회’라고 했을 때는 별 소리를 해도 물량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 전체의 물량주의와 같다. 그러나 물량주의에 빠진 것 자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문제는 물량주의에 빠진 원인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명을 잃은 것에서 온다. 그게 가장 가슴이 아프다.
예수의 말대로 ‘지극히 작은 것들’을 내 지체로 느끼는 체감이 식지 않으면서 내가 열심히 일하고 모으면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성장 지향’은 성서적인 과제가 상실되면서 왔다. 그리고 커지면 한번 잡고 흔들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힘, 돈, 지식도 남으면 한번 써보고 싶어진다. 누구든지 다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는 부자 천당 못 간다고 한 것이다.
‘교회가 커져야 더 큰 일을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분이 어떤 분인가? 그게 헛소리일 수도 있다. 이미 교회의 성장주의는 끝났다. 큰 교회를 만들려고 계획하고 설교, 백일기도 하는 것 말짱 쓸데없는 짓이다. 그 결과가 이 오늘의 현실을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5.16 전까지 대교회 흐름이 없었다. 그러나 5.16은 한국인들의 생각을 물질적이고 타산적으로 만들어 내면서 경제적인 동물로 만들었다. 그 때 이상하게도 똑같이 대교회 운동이 일어났다. 대교회들은 융자에서도 큰 혜택을 주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교회 목사들은 에누리 없이 정권과 철저하게 결탁했다.
성장주의는 이제 끝났다. 대교회는 돈도, 조직도, 문화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유지될 수 있겠지만 끝났다고 본다. 이제 커지는 교회는 안 된다. 그래도 난 줄어드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시민들이 몰랐다. 시민들이 거짓 종교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면 어떻게 교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유대교에서 예수가 한 공동체를 끌어낸 것처럼, 그 공동체에서 루터가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처럼 공동체에서 새역사를 지향하는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예수가 역사의 답이라고 본다.

앞으로 기장이 해야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는 해야 된다. 기장을 통해서 한국기독교 사회에서 고백했던 종교와 역사의 고백을 새롭게 해야 한다. 종교를 역사와 분리하는 것은 가짜다. ‘역사에 책임을 지는 신앙공동체’,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최근 기장이 형편없어진 것은 총회장 뽑는 것 보면 안다. 총회장들이 기장을 ‘역사적인 신앙공동체’라는 고백을 가지고 스스로 교회 앞에 서지 않는 것 같다. 기장이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 제시했던 역사적인 소명은 분명히 말해서 상실했다. 김재준을 시작으로 기장의 어른들이 내놓은 세월을 뛰어넘는 역사적 고백들을 추려내고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 역사를 위한 투쟁의 복원이 필요하다.
종교는 인간으로서 나, 시민으로서 나를 자각하도록 한다. 종교 자체가 안 커도 민격이 오르면 그게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런 얘기를 목사들은 불편해할지 모른다. 목사가 교회에 매여 있으니까 교인들 바보 만든다.

 

   
 

성공하려 하지 마라

<씨알의 소리>에서 긴 시간을 활동해 오셨는데, 지금의 한국교회에 대해 故 함석헌 선생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 것 같습니까?
1956년 사상계 1월호,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이 함석헌 선생님이 대중 앞에 나선 첫 글이다. 1950년대 글인데도 불구하고 딱 지금 하는 얘기인 것 같다.
이미 그때 함 선생님은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했으며, 실패한 이유가 외형적으로는 ‘교파싸움’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교파싸움은 ‘사명’을 상실한 데서 온다. 적어도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받은 사명을 상실한데서 오는 것이 ‘교파싸움’이고 ‘성신운동’이라고 하셨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밖에서 답을 찾게 된다. 그것이 ‘교파싸움’, ‘성신운동’, ‘부흥운동’이라고 하셨다.
함 선생님은 이미 50년대를 넘으면서 ‘선생님은 기독교인입니까? 아닙니까?’라고 물으면 ‘그렇다면 그럴 수 있고, 아니면 아닐 수 있다.’고 대답하셨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보편적인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보다 타 종교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노자, 장자, 불교, 힌두교, 다가바드 기타까지도 관심했다. 아마도 지금쯤 살아 계셨다면 조직 기독교에는 별 관심 없었을 것이다.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와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개척하고 교회를 키워나가는 분들은 먹는 것도 힘드니까 말 자체가 사치스러울 수 있지만, 먹고 사는 것만 괜찮으면 성공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큰 교회 만들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바닥을 치고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성서적인 귀로 듣는 다면 가장 나쁜 말이다. 예수는 바닥에 온 사람이다. 바닥을 치고 올라간 사람이 아니다. 바닥에 있다가 바닥에서 간 사람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높이셨다고 신앙적으로 고백했을 뿐이다. 바닥을 치고 나가면 바닥과 관계없어지는 것 아닌가? 적어도 목사가 바닥 살이 할 각오는 해야 한다.
장준하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던 계훈제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70년대 초쯤 한번은 종로 길에서 만났다. 고무신에 작업복을 입은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선생님과 다방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선생님 고생하시는데, 우리도 좋은 때가 안 오겠습니까?’ 했다.
계훈제 선생님이 그 소리를 듣더니, ‘아이고 이 사람 목사 다시 되어야 되겠구먼, 좋은 때는 무슨 좋은 때야. 이렇게 사는 거지.’ 그러셨다. 그때는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렇게 사는 거지.’라는 말이 계속 들린다.
그 분은 자기 삶에 대한 존엄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 정말 성서를 삶의 법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성공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성공한다는 것은 현재 삶에 대한 거부이다. 나도 앞으로 잘 될 수 있다. 굉장히 좋은 말 같지만 현재에 대한 무시이다. 내 현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살림하는 것인데, 성공하겠다는 것은 지금 삶에 대한 훼손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주신 삶에 감격하고, 때로는 울고, 더 넓게 주시면 넓게 일하고, 크게 주시면 크게 일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서 예수를 체험하지 못하면 가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