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의 절필 선언을 바라보는 문인들의 선언
2013.07.25 00:05
안도현 시인의 절필 선언을 바라보는 문인들의 선언
절필선언이 강요되는 시대, 우리는 함께 싸운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아니, 그와 같이 다양한 시선과 목소리가 합해졌을 때에만 한 시대가 만들어진다. 5,000만 개의 시선과 목소리가 존재하는 곳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생각은 다르게 마련이며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언쟁도 당연하다. 그것이야말로 한 시대의 활력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구성원이자 주인인 국민이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 한다는 것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은 사적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공권력이 국민의 눈과 입을 가로막던 유신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국내외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뉴스들 때문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지난 주 우리 한국 문학인들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의 동료이자,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 중 한 명인 안도현 시인이 돌연 ‘절필 선언’을 한 것이다.
언론에 이미 보도된 것처럼, 안도현 시인은 최근 검찰로부터 기소 처분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상징인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이 유신 시절 청와대에 보관되어 있다고 나와 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 것이냐?’고 개인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이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거나 비방할 목적이었다는 것이 검찰의 송치 의견이다.
지난 정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국가 공권력의 국민에 대한 기소권 남용이 이번 정권에서도 연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사건의 전개 추이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립되기 힘든 기소 조건을 지리멸렬한 논리와 기발한 법리 적용을 통해 이번 정권은 재판을 길게 끌고 갈 것이다. 1심 결과가 나오면 또 항소하고, 2심 결과가 나오면 또 항소할 때마다 시인을 재판정에 불러, ‘그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냐?’ 묻고 또 묻게 될 것이다. 질문이 이와 같으면 대답도 하염없이 반복될 것이다.
말로 다투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말에 대한 말, 그것도 허망하고 소모적인 말을,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에게 강요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또 소모적인 일인지, 기소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든지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듯하다. 그 부질없는 말의 소모전 속에 놓일 것을 스스로 감지한 안도현 시인이 결국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일제 시대 말기, 우리의 선배 문인들 몇몇이 절필 선언을 한 적이 있다. 한글 매체의 발간이 중지되고, 일제가 친일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쓸 것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나라를 잃은 시기, 민족의 혼을 잃지 않으려던 선배 문인들은 이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로는 자발적인 선택이었지만, 오직 그 방법 밖에 남아있지 않았었다는 당시 정황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강요된 선택이었다. 이게 지금부터 70여년 전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난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그 뒤로 유신 독재 시절, 몇 몇 문인들의 입을 공권력이 강제로 막은 일이 있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필화 사건’을 일으킨 국가 권력은 문인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고, 그들의 책을 서점 판매대에서 강제로 걷어 내기도 했었다. 문인들로서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암흑의 세월이었다.
이러한 일이 당사자 개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일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인들에게는 오직 ‘말’과 ‘글’ 뿐이다. 국가가 나서 입을 막고 펜을 빼앗는다는 것은 폭력을 넘어 한 영혼을 말살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뿐인가. 당 시대의 언어, 당 시대의 의사소통과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 그 나라의 문인들이다. 작금, 우리는 19세기말 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문인 에밀 졸라는 프랑스 국가 권력이 저지른 간첩 조작 사건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결국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양심적 지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지만, 그건 또한 예술과 자유의 나라로 칭송되던 프랑스의 치부가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다.
안도현 시인을 기소한 측에서는 안도현 시인의 명망성 등을 이유로, 개인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이지만 그 파급력이 컸으므로 단죄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기소로 시작되어 한 시인이 붓을 꺾게 된 이번 일을 지켜본 우리의 입장은 다음 같다.
1.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어디 있는지, 밝히기만 하면 될 일인데도 그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느냐, 시인이 입을 막기에 급급한 국가 권력의 작태를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일은 철권 정치가 판치던 겨울 공화국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신호탄인가!
2. 검찰에서 안도현 시인의 파급력이 대선에 영향을 줄 만큼 큰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국기문란 사건인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등에 관해서는 왜 수사가 그토록 지지부진한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훨씬 더 명명백백하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무원 조직인 국가정보원이 국민들의 투표 선택권 행사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검찰은 왜 국가정보원에 대한 수사를 미루고 있는가? 현재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는 NLL 대화록 문제를 비롯해 정권이 처한 난제를 벗어던지기 위한 ‘물타기용 꼼수’로 안도현 시인을 기소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와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3. 안도현 시인의 절필은 단지 한 시인의 절필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했던 시절이 있다. 역시 기억하기 싫은 유신 시절의 일이다. 안도현 시인을 절필로 몰고 간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의 이상 징후에 대해 눈이 밝은 시인이 먼저 선언적 행동을 통해 경고한 것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인다. 안도현 시인의 경고처럼 한국 사회의 이상 징후, 한국 문화예술의 침체가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안도현이 될 수밖에 없다. 동료 문인을 위해, 아니 이 나라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다.
탄압을 받는 양심적 문인은 존경의 대상이지만, 탄압을 자행한 국가와 사회는 비난의 대상이다. 한 시인의 입에 이와 같이 재갈을 물린 사건이, 이 나라의 국격을 얼마나 현저하게 떨어트리고 있는지, 국가 권력은 깊이 생각해보길 권하며, 안도현 시인이 다시 붓는 잡는 날까지 우리는 늘 그와 함께 한다는 의지를 이번 성명서를 통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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