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507638
  • Today : 1192
  • Yesterday : 806


위대한 발견

2009.09.14 21:15

물님 조회 수:6630

                     위대한 발견

 

 

예수의 말씀을 반지에 비유한다면 산상수훈을 반지의 보석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마태복음서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끝머리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가 있다. 왜 저자는 이 본문을 맨 끝에 두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산상수훈에 담겨진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자기 존재와 삶의 집을 바위위에 짓는 사람이고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의미이다. 삶의 결정적 지혜는 내가 지금 어떤 바탕위에 서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나의 발견이며 곧 진리의 발견이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 위대한 발견을 해야만 한다.

 
어리석다(moros)는 말은 무디고 우둔한, 바보 같고, 맛없는 인생을 뜻한다. 삶을 무감각하게 빈둥거리며 무미건조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치는 사람이다.(마태 7:26)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지구에 보냄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무지하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삶의 모든 조건들이 은총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다. 삶을 맛없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자기모순이며 불행이 되는지를 모르는 무지에 빠져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무지야말로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만 한다.

 
삶 속에는 바다의 파도처럼, 폭풍과 홍수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같은 일도 스트레스(방광)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 일속에서 지혜와 은혜의 조건을 깨닫는(가슴)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떤 현실의 폭풍도 무너뜨릴 수 없는 내면의 집을 가진 사람은 상처 받지 않고 자신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 그러나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집이 무너지게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집은 꿈 해석에서도 인간의 의식 상태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식이 어떤 바탕위에 집을 지어온 인생을 살았는가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만 한다.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터에다 집을 짓느냐의 문제이다. 우둔함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집을 지으면 지을수록 헛고생만 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적 상태에 깨어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피타고라스는 ‘깨달음을 얻는 자 혹은 진리에 도달한 자는 영웅이다’라고 했다. 삶에서 단 하나의 영웅적인 행위는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그 밖의 다른 어떤 일도 이 일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산상수훈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명예와 돈과 정치권력을 손에 넣는 데는 목숨 걸고 노력들을 하면서 정작 자기 존재의 각성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비극이 아닌가. 삶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하게 하는 것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진리를 알고 신을 아는 것이며 내 존재의 집을 반석위에 세우는 일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에니어그램 도형의 삼각형이 보여주는 힘과 지혜와 사랑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이 조건들을 온전히 누리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존재의 사람이며 그 존재 자체가 은혜로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지옥은 없다. 만약 그가 지옥에 간다 해도 그 순간부터 그는 자기 주위를 천국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천국에 갖다놔도 그 순간부터 주위를 지옥으로 오염시킬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숨 쉬는 것 ,걷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사랑하는 것 등이 다 행복하다. 불행한 사람은 숨 쉬는 것도 힘겹고, 걷는 것도 힘들고, 먹는 것도 고통스럽고, 자는 것도 안락하지 않고, 불평의 연속으로 살기 때문에 삶 자체가 불행하다. 행복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행복을 지니고 다니고, 불행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불행을 지니고 다닌다. 행복한 사람은 장미의 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는데 불행한 사람은 장미의 가시를 세면서 따지고 불평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장미의 꽃을 보고 있는가? 장미의 가시를 세고 있는가? 나는 지금 행복에 겨운 밝고 환한 표정을 하고 있는가? 불행에 찌든 표정을 하고 있는가?

건강의 핵심은 부드러움에 있고 행복의 핵심은 가벼움에 있고 깨달음의 핵심은 고요함에 있다. 부드럽고 가볍고 고요한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우리는 본래 아름다웠다. 그런데 왜 지금 나는 딱딱하고 무겁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야만 한다. 지금 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고요하게 주시해 보아야 한다. 왜 이 세 가지의 중심이 맞지 않고 있는지 알아 차려야 한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불평하고 쓸 데 없이 앞일을 걱정하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스스로 고갈시키고 있지 않은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가장 지혜롭고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의 행동이 아니라 그 분과의 살아있는 관계(반석) 위에서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전제가 없다면 그가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버림 받게 될 것이다. 말씀은 머리의 지식과 가슴의 열정을 지나 몸으로 체화되어야 하고 사랑의 에너지로 기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반석의 길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와 이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야 말로 위대한 발견이며 위대한 삶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