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시작
2009.10.01 21:52
경험의 시작
구르지에프는 제자들에게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를 자주 묻곤 했다. 이 물음을 지금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본다면 그대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나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르신 ‘부르심’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고백이다. 내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에 부응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나를 지금 부르셨다. 그 부르심을 복음이라고 한다.
복음으로 새로운 삶을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1장) 베드로서는 지상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성장해나가야 할 여덟 개의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은 신성의 길에서 첫걸음이다. 인간이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는 바로 서게 된다. 즉 직립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그 분의 힘을 자신의 밑바탕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밑힘이라고 새겨도 좋을 것이다. 믿음은 열정의 살아남이다.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이다. 일체가 은혜임을 알고 삶을 삶답게 누리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불빛은 어둡던 내 마음을 깨우고 빛의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19절).
믿음은 능력의 샘이다. 그 샘을 가진 자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기가 죽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되면 머리를 깍인 삼손처럼 무기력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많은 감각과 감성과 영성이 살아날 수 있는 기본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힘이 없는 자는 영적 지혜를 깨달을 수가 없다. 실재를 실재로 볼 수 있는 눈이 멀게 된다. 자유롭게 살아있는 영혼만이 올바르게 볼 수 있다. 수동적으로, 의존적으로 사는 사람은 남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누군가가 사랑해 주고 인정해 주어야만 행복할 거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원하지 않는지를 알아차리고 자유롭게 자신을 위한 결정을 행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절제는 이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몫이다.
모든 것을 갖지 않아도, 그 무엇인가를 포기해도 자신이 자신을 위해 한 결정은 그를 비참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제는 결정을 내리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절제는 인내와 지속성과 단호함, 지구력을 의미한다. 어려운 상황을 지속적이고 단호하게 견디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과 경건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집을 짓는 데 있어 반석이다. 공경이란 ‘하나님에 관한 앎과 그에 대한 태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 앎의 여정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과 하나 되고 자 하는 열망이 믿음이요 경건이다.
칠십인역 구약성서(Septuaginta)에는 ‘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다’(잠언 1:7)를 ‘주님을 경외함이 경험의 시작이다’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신비를 경험하는 자는 이 세계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시기에 좋게 경험할 수 있다. 욕망에 눈멀고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사람에게 존재들의 신비가 보일 수 없다. 일과 사업에 미친 사람은 가족들이 보일 턱이 없다. 가정 파탄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룬 이후에야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현실인가. 인간의 경험세계는 그의 의식 수준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애벌레는 애벌레의 경험만이 있을 뿐 나비의 경험세계를 알 까닭이 없다.
사랑은 존재의 체험을 한 자들에게 열려지는 차원이다. 이런 사랑만이 나와 너를 자유롭게 하는 열린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지고 상처 받은 인간의 가슴을 치유할 수 있다. 사랑은 믿음의 열매이다. 믿음이 씨앗이라면 사랑은 열매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완성이다. 인간이 최고의 질로 산다는 것은 영적 사랑의 단계에 돌입할 때이다. 인간의 성장과 해방은 집착에서 자기 초월의 사랑을 할 수 있는 단계로의 진입이다. 만물은 자기 성장과 변형의 과정을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가고 있다. 텐 에니어그램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주제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힘이 있어야 한다. 물질과 정신과 영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만 한다. 그 지혜의 완성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완성만이 인간이 거룩한 신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하게 한다.
구약 시대에는 지리적 공간의 탈출이 구원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한 의식과 내적 자유로 성장하는 자기초월의 탈출을 제시하고 있다. 애벌레와 나비의 세상은 전혀 다른 것처럼 자연인과 믿음의 사람은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늘이 다른 것이다. 존재의 뿌리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원하는 썩어 없어질 것들, 일시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심한 근시안을 가진 사람들처럼 코앞만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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