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2009.10.14 20:50
마리아
마리아하면 어떤 이미지나 단어가 떠오르는가? 성모마리아로서의 초월적 이미지를 연상할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수난 받는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종교적으로 마리아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은 마리아가 여성성의 원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원형이란 여자와 어머니의 두 역할이다. 모든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그릇을 가진 존재로서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라는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된다. 옛날에 모계사회가 있었던 것처럼 원시시대 때부터 여인들의 삶과 공간은 공동체의 삶과 변화의 중심축이었다.
아이의 탄생과 성장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아이가 성장의 단계를 밟아갈수록 여자의 의식공간은 함께 넓혀지게 된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 변화에 대한 특별한 지각 능력이 여자에게 있는 이유는 자녀의 변화 과정을 몸으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과 성장과 활동과 죽음의 현장에는 마리아와 함께하는 마리아들이 늘 함께 했었다는 것을 복음서는 증언해 주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밑바탕에는 마리아의 찬가가 자리하고 있다. 마리아는 배꼽이 연결된 소장의 전적 수용과 간의 안정과 보호, 그러면서 신장의 명료한 판단력과 순수한 지혜가 있었다.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의 삼박자를 잘 갖춘 사람이었다.
국교화된 로마교회의 전통은 마리아를 여성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 묘사해 왔다. 심지어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우주적인 위엄의 존재로까지 숭배하게 되었다. 교황과 시리아 주교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은 이에 대한 논란이었다. 13세기에 미켈란젤로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를 주제로 한 피에타라는 조각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운명한 아들을 안고있는 여인의 고통스런 모습은 고난 받는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예수의 상처와 죽음은 마리아의 상처요 죽음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고통을 피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그 고통(예수)을 안고 변화시키는 어머니를 묘사하고 있다. 고통과 슬픔 때문에 풀무불의 쇠처럼 더욱 강해지는 어머니를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니고데모라는 인물(자화상)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과 신념을 표출하고 있다.
여자의 삶은 가족 전체의 고통을 안고 간다. 많은 여인들이 가족의 상실과 고통을 통하여 슬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 개인의 사랑과 의지, 일등을 포기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문제는 그 고통과 슬픔 안에 갇혀 사느냐? 아니면 그 밖으로 나오느냐? 의 선택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늘 흔들리고 상처 받고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삶의 매 순간을 은혜와 축복과 감사와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하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매사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방광형의 사람도 있다. 삶을 배움과 축복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어려운 순간마다 자신에게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피에타상의 마리아는 홀로 있지 않았다. 옆에서 부축해주는 니고데모가 있었고 마리아는 그 도움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을 신뢰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작품은 전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하지 못할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사실을 거부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남 탓을 하게 되고 고통과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배움은 없고 성정은 멈추게 된다.
하나님은 겨울 만 주시는 분이 아니다. 죽음과 고통만 주시는 분도 아니다. 봄을 준비하시고 고통 다음에 희망을 준비하신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닌가. 처녀가 임신하는 일도 마리아에게는 믿음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일이 되었다. 그 사건은 마리아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관을 내려놓게 하는 사건이었고 천사의 말을 따르는 결단을 하게 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놓겠다는 결단을 한 사람이었다. 나사렛 동네의 한 소녀가 하나님을 만나자 자신의 참된 위대함과 존귀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보통 쓰는 겸손의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남자들만이 주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주님의 종노릇을 하지 못 할 때 분연히 한 소녀가 일어나 주 앞에 몸을 던져 고백 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38)
마리아는 자신과 자신의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철저하게 긍정했던 여성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예수를 보내 주셨고 마지막 길까지 함께 걸어가게 하셨다. 나는 이 땅의 여성들이 주체의식이 투철한 인간이었으면 한다. 길들여진 여인들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라고 떨쳐 고백하는 마리아였으면 한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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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선 남자의 모습이
아버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가정과 학교 등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도 안정되고 견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