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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재 성탄 연합예배[12.25]

2009.12.26 15:58

구인회 조회 수: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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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우주의 별 갯수는 몇개나 될까요, 우주의 크기는요?
    우리 은하계에 1~2천억개의 별이 있고, 이런 은하가 1천억개 가량 
    존재한다고 하는데, 합치면 지구상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별이 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별세상에서 지구별은 먼지보다 적은 크기요
    지구에 속한 사람은 물질의 분자 보다 작은 크기이겠죠.  
    즉 물질계에서 보면 인간은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간다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장엄하고 표현불가능한 세상, 놀람과 신비이외는 다른 표현이 
    불가능한 세상에서 2천년전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합니다.
    우주의 수많은 별 중에서 어느 별이 베들레헴 작은 곳에 멈추게 됩니다.
    당시 유대는 모든 형태의 주술적 행위와, 별을 통해 정보를 터득하려는 행위를 
    죄로 여긴바 이 기상천외한 현상을 유대땅에서는 아무도 관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성인을 잉태하는 우주의 징조를 까맣게 모르는 사이
    저 먼나라 동방의 페르시아에서는 성현들의 지혜를 토대로 
    인류의 메시아가 출현할 거라는 예언을 믿은 천문학자들이 
    심상치 않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만사 제쳐두고 사막을 지나 유대로 건너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터라
    이들의 순례는 두려움과 목숨을 건 대장정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종교는 배화교, 즉 조르아스터(짜라투스트라)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종교가 전혀 다른 이들이 타종교인 틈 속으로 들어와 뜨겁게 경배를 드린 겁니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이 그 옛날 유대 배들레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나 그와 같은 일이 여기 산  불재 에서도 일어납니다.
    이 나라 이 지역에도 수만 교회가 있고 수만 사람이 한 하늘 아래 살아도
    아무도 축복의 날을 교류하지 않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
    다름 아닌 종교가 다르다 해서 서로 배척하고 미워하는 불가에서
    대형 축하 화분을 보내고 대한불교조계종 귀신사 주지스님과 신도 대표들이
    예물과 축하 메세지를 전해주러 오신 겁니다.
    황금과 유향, 몰약 대신 예물과 쑥떡과 자비심을 들고 큰 산 넘어 오셨습니다.
    심지어 귀신사 무여(주지)스님이 예배시간에 축하노래까지
    불러 주시고 성찬식까지 참예하시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일체법을 듣고 공양도 함께 하니
    이 모든게 청정한 사랑과 자비가 아닐런지요.

    세간해 물님은 지광보조 智光普照 세상을 비추는 지혜의 법을 설하니 
    선재선재 善哉善哉. 좋고 좋아서 영혼의 춤을 춥니다.
   "무(없음)에서 창조하는 힘이 아기 예수님을 지구에 보내셨다.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하느님이 우리를 보내신 목적과 똑 같다.
    저 높은 곳에는 영광, 이 땅에서는 평화다.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평화로운 사람이 되라
    자기 안에 평화를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이의 공통된 화두다.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 노니까 가슴이 행복하지 못하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무와 공, 하느님나라에서 나와 지구에 있다가 돌아간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왔다가 가는 존재이다.
    힘의 법칙으로 살다가 원으로 돌아간다.
    정반합이 이 세상의 운동적 원리이다.
    중심의 힘과 원심력과 구심력 이 세힘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래야 내 가슴이 행복하고 후유증이 없다.
    천지인 합일, 삼위일체, 불법승 세가지는 내 자신과 일치되는 힘들을 의미한다.
    인격적인 균형을 이루고 곡식들이 익어가듯 자기를 완성한 사람들 만이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할때 우왕좌왕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만다.
    선택하는 것, 배척하는 것, 왔다갔다 하는 에너지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후회하는 삶의 내용을 보면 이 세가지에 걸려 있다.
    삶의 애매모호함으로부터 어떻게 깨어나야 할지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중대한 힘을 얻어야 한다.
    인생은 공에서 공, 무에서 무, 하느님으로 가는 여정이다.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게 아니라는 지혜,
    별을 만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고백이 나온다.
    루터는 인간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라고 말했다.
    내가 구유라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존엄성을 지켜가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며,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님의 폭탄선언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거다.
    가난한자나 부자나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가 같다는 선언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목숨을 던져서 얻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의미한다
    내 스스로 봉사나 헌신이 아니면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무릎꿇고 살아서는 안된다며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삶에 두어야 한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은혜다.
    지금 행복하지 않고서 미래에 행복해 질거라는 망상은 미친거다.
    존재의 뿌리를 무에서 무로 삼고 생명에 촛점을 모을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배우는자 희망하는자 탐구하는 자, 이 셋을 지켜야 한다.
    배우러 가겠다고 할 때 단 한명도 거절한 법이 없다.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하고 한 순간에 가까워진다.
    배우는 자는 겸손한 자다.
    성탄을 맞이해서 배우고, 소망하고 탐구하는 이가 되었으면 한다. "

    이번 성탄축하 말씀은 대방광 이실법계, 
    무無와 공空, 하느님 나라
    삼계를 넘나든 그리스도의 유심연기 唯心緣起를 통해서
    함부로 무릎꿇지 않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원형을 회복한 말씀이셨습니다.
    미래에 끝없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이순간 바로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탄.. 청정하고 밝은 빛이 이 세상을 비추고
    무여스님. 처연한 노랫가락에 소매를 적십니다.
    
    "멍텅구리~ 멍텅구리~ 이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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