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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들로 부터의 각성

2014.05.26 10:28

물님 조회 수:6688

당연한 것들로부터의 각성

                                            

     마태 4: 1 - 11

 

그대는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하게 지향해야할 가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단어들을 적어보자. 나는 이 아침에 내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들을 적어보았다. 


자유, 열정, 자비, 말씀, 하나님의 형상, 창조의 책임, 유머감각, 비움, 의분, 상상력, 가정 ---


위에 나열한 단어들의 특징은 돈으로 살수 없는 주제들이다. 삶이 삶다울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은 돈으로 거래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소비지상주의체제이다. 소비를 촉진하는 새로운 상품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소비시스템은 맹렬한 가속도로 굴러가고 있다. 우리는 돈을 주고 상품을 사는 시스템에 길들여지면서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식어가고 그 자리에 돈과 일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바쁘게 일에만 매여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명퇴당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현실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번 돈으로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심지어 사람까지 사는 세상에서 창조의 열정이 살아나고 만물을 경이롭게 보며 기뻐하는 신비의 눈을 뜨고 살아간다는 것은 진달래교회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산 아래 세상에서는 어림없는 현실이다. 철학자 요셉 피퍼는 ‘부르조아 근성의 본질은 당연시하는 태도’라는 통찰을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길들이는 시스템이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라는 그의 통찰은 깊은 울림이 있다. 요즈음 관파아, 모피아라는 단어가 뜨고 있다. 부정과 비리의 온상처럼 들려지는 그 단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 결과로 총체적인 한국사회의 부실화를 상징하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각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투쟁은 당연시하는 태도를 거부하고, 당연하게 보아온 대상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만나는 각성에 있다. 어제처럼 오늘도 살아가는 태도를 버릴 때 우리는 늘 그런, ‘늙은이’로서의 삶을 청산할 수 있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 내가 보고 걸을 수 있는 것, 여름이 온 것, 산이 녹색으로 나를 반기는 것, 석양빛의 역광에 빛나는 엉겅퀴 꽃, 겨울을 견디고 봄날에 피어나는 야생화들 --- 이런 일들이 당연하게 생각되다 못해 아예 보이지도 않게 되면 우리의 감각은 마비되고 감성도 영성도 막히게 된다. 인간의 위기, 환경의 위기는 결국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는 영성의 빈곤, 영성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예수의 광야 시험은 모든 인간이 당연하게 소원성취의 대상으로 구하고 있는 것들과의 결별이다. 물질과 권력과 종교적 신비는 모든 인간들이 꿈꾸는 축복의 내용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들을 거부했다. 예수에게 있어 빵은 남보다 많이 갖고자하는 빵이 아니라 물질을 초월하는 생명의 빵이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4절)

성만찬의식에서 예수는 이 빵은 나의 살이라고 말씀했다. 나누고 먹히기 위해서 찢겨져야하는 빵의 운명처럼 나와 너는 아버지의 제단에 바쳐지는 빵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빵이 빵으로만 있으면 빵일 뿐이지만 그것이 찢겨져 먹히워질 때 빵은 사랑이 되고 생명이 되고 존재의 목적이 성취된다.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고자 했던 예수에게 유혹으로 다가온 권력은 세상의 왕들이 행사하는 군림하는 권력이었다. 그러한 권위적 권력으로서의 힘은 예수에게 거부의 대상이었다. 예수의 의식공간으로서의 집은 몇 평으로서의 면적을 갖는 집이 아니라 우주로서의 집(oikos)이었다. 우주적 의식을 가진 예수에게 이 세상에 속한 악마의 유혹은 통하지 않은 것이다.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요한 14:2 -3)

 

결국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다. 공간과 시간과 인간에 대한 의식의 확장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있는 열린 눈이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늘 새로운 시작을 열어 우리에게 주고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늘 ‘지금’이라는 선물을 통해 늘 새로움을 주시고 있다. 그 새로운 대상들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당연하게’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 의식의 비늘을 벗겨내자. 내 눈에 지금 보이고 있는 것들이 은혜의 선물인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있는 것들인지 잘 살펴보자.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은 일상의 성스러움 속에 있음을 확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