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길, 이해의 길
2010.02.17 07:38
인식의 길, 이해의 길
감리교 신학대학장이었던 변선환교수가 생전에 원불교 전국 교무단 수련회 강사로 오신 적이 있었다. 삼일동안의 교육이 끝날 때 변교수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통찰에 감탄한 어느 교무가 ‘변교수님이야 말로 불교의 최고봉에 오른 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격찬의 말을 쏟아 내었다. 그 때 변선환 교수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식과 이해’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칠판에 두 단어를 적었다. 내가 불교를 ‘이해’했다면 그것은 내가 석가모니가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단지 불교를 인식하는 사람일 뿐, 불교를 연구하지만 이해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크리스챤이고 목사이다....
이제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그날 그 순간의 감동어린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분이 세상을 뜨기 삼일 전 쯤 익산에서 하루 동안 함께 하면서 조잡한 의식의 세상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는 자의 외로움과 슬픔을 나눈 적이 있다. 교권을 농단하는 자들은 그에게 종교 다원주의자라는 굴레를 씌어 명색이 신학대학장에게 신앙고백서를 내라고 하고 급기야 학장의 자리에서 내쫓는 무지한 일을 저질렀다. 그 분을 죽음으로 내 몰은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붕새의 하늘 밑에는 참새와 제비들의 입방아가 있기 마련이지만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신앙이란 종이에 적은 신앙고백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삶은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인식의 길을 가는 사람과 명료한 이해의 길을 가는 사람의 차이를 드러낸다. 신앙이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인 학습과 확인에 의한 것도 아니고 오감의 감각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이룩한 행위이다. 이해란 의도적으로 배운 지식과 온갖 삶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의 정보는 나눌 수 있어도 이해는 서로가 아무리 주고 싶고 받고 싶어도 나누기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살아온 모든 삶을 통하여 깨달은 바와 경험을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가르침으로 내 자신이 행복해 진만큼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열망으로 내가 말한다 해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웃고 핍박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진리의 깨달음이 주는 희열과 내적 이해를 함부로 말하는 것은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 시기심의 눈을 뜨게 하고 영적 열등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텐 에니어그램 수련생들에게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곤 한다.예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했다.(마7:6) 거룩한 가치를 모르는 개들은 자신이 원하는 사료가 아닐 때 공격의 이빨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듣는 사람의 지식을 위해서건 이해를 위해서건 간에 대화를 할 때 인식되는 것의 질은 말하는 사람 자신 안에 형성되어 있는 자질의 여하에 따라 좌우 된다. 즉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인식과 이해의 내용이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를 말하건 에니어그램을 전하건 그 내용을 지식의 라인으로 전하느냐, 아니면 존재의 라인으로 전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과 깊이가 다르게 전달되게 된다.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고 이기심이 극복되고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그의 말은 자연스럽고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 지식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암기된 지식의 전달에 불과 할 것이다. 신앙과 지혜를 다루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머리에서 머리로 전달되는 말들은 시간과 함께 기억이 희미해지지만 존재에서 나와서 존재로 전달되는 말들은 세월이 갈수록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 이해는 존재로 통하지만 지식은 존재 속의 일시적 상태로만 머물게 될 뿐이다. 지식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지식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이래서 지식은 무(無)에서 무로의 변천이라고 말한다.
에니어그램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이해를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에니어그램이 직관의 지혜를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해의 길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게 통하는 길이다.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성전 뜰만 밟는 삶의 방식으로는 의지에 의한 경험과 의지를 초월하는 경험 모두를 자신 안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영혼을 갖는 다는 것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그 영혼을 키워가는 노력이 없이 신앙을 말한 다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취미 란에 자신의 종교를 기재해야 할 것이다.
영적 자각과 수련은 젊은 청년기에 해야만 하는 데 과도한 입시경쟁과 취업난 속에 시달리는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도 안타깝기만 하다. 가장 세련된 유물사관인 자본의 논리 속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이 유린당하고 교회가 시들어 가는 형편이 안타깝기만 하다. 돈이 없으면 무너지는 종교는 종교가 아닐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의 좁은 길은 접어버리고 주입된 교리로 인식의 틀을 더욱 공고히 하는 종교 역시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린 종교에 불과 할 것이다. 이해의 길은 바라봄이 아니라 되어감이고 앎이 아니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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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들어도 오늘 첨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