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507711
  • Today : 1265
  • Yesterday : 806


나는 네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

2014.09.14 10:50

물님 조회 수:6409

 

나는 네 안에서 아버지를 본다.

 

                 요한복음 14:1-14

 

 

어제 나를 찾아온 분이 쇼킹한 글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 내용인 즉 어느 신학교 교수가 남 수단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태석신부의 삶을 담은 ‘울지마 톤즈’ 영화를 보여주고 소감문을 적어내게 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감동적이었다는 평을 하면서도  ‘그 신부는 구원을 받았을까?, 아마 천주교인이니까 구원을 받지 못할거야 ..’  라는 글을 말미에 적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 대해 의견을 묻는 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똑 같이 햇빛도 비도 내려 주신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완전한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거라’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말로 대신했다.

 

그 분 때문에 '울지마 톤즈'를 다시 검색했다.

 

“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 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왜 이렇게 교회가 잔인한지 싶다. 전쟁의 아수라장에서 다치고 병들고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품고 품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보면 되지 어찌 하나님도 아니면서 구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안타깝다. 교리가 무엇인데 자기가 속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이 있다고 편협하게 생각하고 사는지 그 무지함에 놀랄 뿐이다. 예전에 이런 시를 적은 적이 있다.

 

         내 유년의 가르침은

 

 

하와를 유혹한 뱀 때문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우리는 형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뱀을 잡아 죽이자고

이 세상을 서럽게 만든 원수

뱀들을 잡아 죽이자고

우리는 논두렁과 야산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전쟁 포로를 잡듯이

제법 큰 뱀 한 마리를 잡아

전신주 옆에 매달아 화형식을 거행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러나 말 못하는 뱀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뱀은 무어라고 항변하며

죽어 갔을까.

뱀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원망과 탓의 비빔밥을 먹어대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뱀을 향한 돌팔매질부터 배운

어린 날의 예배당

내 유년의 가르침은 그래서 슬프다.

                              2012,11,22

 

 

예수는 손에 든 비판과 폭력의 돌팔매질을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셨다.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 ‘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다.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그 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이루고, 되어가느냐 하는 데 의식의 초점이 모아져야 할 텐데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데 의식의 초점이 있다면  신앙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류는 한 형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선한 자난 악한 자 모두에게 비처럼 햇빛처럼 퍼부어지고 있다. 다만 그 비와 햇빛이 살아있는 나무에게는 생명이 되고 죽은 나무에게는 생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What It is)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랑은 너무나 깊기 때문에 단지 그렇다는(That It is)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십자가라는 제물로 바치게 하는 사랑을 내 자신의 경우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그 사랑을 이론화하고 교리화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드러나게 할 뿐이다. 사랑이든 진리든 생명이든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설명이 아니라 나의 삶과 존재로 드러나야 할 주제들이다.

 

내가 나의 저서에 자주 “ 가을 강은 하늘을 담는다”는 말을 적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가을 강물처럼 되어 하늘을 담는 존재가 되는 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야할 과업이다. 나의 길과 목표는 여기에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뜻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의 기본 원소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아원자(Subatonomy).내가 마시는 공기도 음식도 향기도 모두 그 분의 사랑이다. 사랑은 온 우주의 중심이고 만물을 살리는 생명이다. 사랑은 나의 세포 속에서 ,한 송이 민들레 꽃을 통해서, 동물을 통해서, 인간과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계속 흐르고 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성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어떠한 다른 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하늘과 땅의 유일하고 진실한 힘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고, 모든 곳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은 사라질 것이나, 사랑은 영원히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항상 계시기 때문이다.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화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인간 의식의 지극히 작은 하나의 모래알 같은  측면에 불과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론화하고 그 것을 종교적 교리로 만들어 주입하는 것은 사랑의 힘을 상실하게 한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 알 수 있는 바처럼 무한한 생명의 사랑이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이해되고 깨닫게 될 때 사랑은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한 가슴으로 경험했던 영혼들은 시대마다 여러 다른 방식으로, 여러 지역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슈바이처는 슈바이처대로 이태석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방식으로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고 부름 받았다.

 

 

사랑이 이러한 것 처럼 진리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어찌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알고자 할수록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진리이다. 교리문답에 적어진 하나님에 대한 글을 외웠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성숙한 지성이라면 과연 그렇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도 진리도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기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진리를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어떠한 결론도 내려서는 안된다. 진리는 헤아릴 수 없고 영원한(eternal)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본성인데 어찌 그 진리를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진리의 권능이 나의 영혼(soul)에 흘러 들어와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은혜로운 비밀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 대한 나의 감응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생명체들에게 같은 생명과 숨결을 주시고 있다. 그 분은 모든 민족을  지상에 살게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고, 그분의 사랑과 창조물에 의해 그분을 알게 하신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고 누구로부터도 떨어져 계시지 않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고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는 아담의 후예로써 한 가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일체가 하나인가, 아니면 분열된 다수인가.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안에 깃든 로고스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의 옷을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수는 제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모든 존재 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그러기에 예수는 “네가 나를 볼 때 아버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2014. 9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