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도마복음한글역주』를 평함 - 차정식교수
2015.05.25 21:31
[차정식]도올 김용옥의『도마복음한글역주』를 평함
견자(見者) 예수를 앞세운 도마와 도올의 선문답
도올 김용옥 교수(원광대 석좌교수)가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2권, 3권을 펴냈다. 이 책에서 김용옥 교수는 “도마복음은 4복음서의 원형” “(어떤 면에서) 예수는 니체보다도 더 본질적인 무신론자”라는 등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주장으로 논란을 예고했다.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를 바라보는 한 신학자의 시각을 싣는다. 그는 이 책의 '학문적 값어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입장이지만, “도올의 치열한 탐구정신은 기독교인들도 배워야 한다”고 밝혔다. (*이 글의 괄호 안에 기재된 앞의 숫자는 이 책의 권수를 나타내며 뒤의 숫자는 그 책의 쪽수를 가리킨다.)
글·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 신약학)
I.
이 땅의 지식사회에서 도올 김용옥의 존재는 그를 둘러싼 복잡한 소문과 극명하게 엇갈리는 개인적인 호오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마력을 동반한다. 남들이 선호하는 한 사립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둔 이래 그가 보여준 행보는 격렬하리만큼 파격적이고 혼란스러웠다. 특히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그가 보여준 과감한 도전과 전복적 언행은 기성 교회에 불편한 원성을 드높였던 게 사실이다. 그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두루 섭렵하면서 일찍이 기독교의 역사적 기원에도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연구에 힘써왔던 바, 그 열정의 산물로 빛을 본 근래 몇 권의 책들이 비록 교회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기독교 지식의 대중화에 불을 붙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 교회를 파괴하는 반(反)기독교 지식의 이단적 횡포라고 평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한국 지식사회의 전반적 지형에서 보면 그의 특유한 열정과 사상의 종횡을 가로지르는 모험적 결기, 나아가 그것을 대중에게 전하며 계몽주의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유희술사로서의 역할 모두 나름의 순기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땅의 신학계를 포함한 우리 지식사회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의 균열이 심하고 배운 것과 사는 것이 겉도는 역리와 배리의 전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자들의 활동반경이 상아탑의 울타리와 교단의 폐쇄적 사육 사이에서 어설프게 휘둘리다보니 그들의 지식이 이 땅에 착근하여 신학의 자생적 근기를 기르기는커녕 서양에서 배운 것조차 활달하게 써먹지 못하는 처지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켜온 감이 짙다. 그 소심한 신학자들의 지적인 미션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도올 김용옥은 좌충우돌 자신의 깐깐한 탐구를 전략적으로 담론화하여 유불선의 동양 경전을 거쳐 이제 기독교 경전의 역주작업으로 대중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II.
그가 이번에 출간한 『도마복음한글역주』는 도합 3권으로 이루어진 꽤 방대한 저서이다. 여타의 다른 역주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는 저자의 범람하는 지적인 열정이 넘실거린다. 이 책의 저작을 위해 그는 도마기독교의 원산지인 근동의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을 장기간 여행하면서 온 몸으로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더했다. 이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동서사상의 합류와 교통의 시도로써 인류 지식의 통섭을 기획하려는 그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특히 서구의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해온 기독교의 경전을 동양사상을 통해 재조명하려는 저자의 탐험은 마침내 도마복음이라는 문헌에 이르러 황홀경의 해석학적 진로를 개척한다. 그는 무엇보다 감탄하며 도발하는 열정적 지성이다. 일찍이 요한복음서와 Q복음서에 대한 역주를 낸 그는 이 책에서 빈번한 감탄과 감동을 토로하며 역사적 예수의 원류를 붙잡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저자 특유의 적나라한 구어체 문장을 곳곳에 뒤섞어 제조해낸 이 책은 그러한 열정의 에너지를 기반으로 동양적 예수에 대한 그의 강렬한 신념이 투사된 결과물로 비친다.
도올의 관점에 의해 재구성된 도마복음의 예수는 다음의 몇 가지 간단한 논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가령, 도마복음은 영지주의 사상에 의거하여 기존의 복음서의 내용을 짜깁기한 후대의 외경문헌이 아니라 그것들 본래의 원형(그의 표현에 의하면 “오리지날 아키타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도마복음이 다양한 전승의 예수 말씀들이 수집된 결과물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필사 시기나 복잡한 과정과 무관하게 “그 로기온의 전승은 최소한 큐복음서와 같은 시기의, 혹은 그보다 빠른 또 하나의 자료체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56-57)는 일각의 주장에 편승한다. 심지어 Q자료조차도 초기 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침윤된 데 비해 도마복음은 복음서의 드라마적 양식에 의거한 사상적 틀에 오염되지 않은 원형적 예수 운동의 성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확신한다(2:332). 이에 따라 그는 도마복음을 ‘소승 기독교’의 출처로, Q복음서를 ‘대승 기독교’란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한다(2:137). 이러한 전제로부터 용인되는 도마복음의 신학적 입장은 탈종말론적 지향과 지혜의 견자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따라 묵시주의적 종말론과 예수에게 부과된 온갖 기독론적 인식은 후대 교회에 의한 왜곡으로 치부된다. 그것은 고작해야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복음서 작가들의 변형 결과였을 뿐이다(2:326).
이러한 해석학적 틀에 비추어볼 때 도마복음의 예수는 견자이자 곧 갈릴리의 유대인 견유학자라는 크로산의 모델로 수렴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험의 여정으로서 말씀의 해석이 중요하며, 거기서 제 실존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 진리 추구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 그 발견은 타인의 해석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개벽과 함께 자신의 해석을 발견하는 앙가주망이어야 한다(2:125). 도올이 앞세운 도마의 예수에게 천국은 시공간의 개념으로서의 천당이 아니요 곧 주체의 개벽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결국 도마복음의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길은 개인의 해탈이요 득도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고독한 단독자로서 제 실존의 심연을 살펴 자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깨치고 전관(全觀), 합일, 전복, 융합을 향해 나아가 “모든 분별이 사라진 웅혼한 원초성”(2:203)에 눈 뜨는 개안의 경험이어야 한다. 예수에게 종말의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묵시주의적 시대 분위기의 소산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예수가 그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창출해내었다는 것이다”(2:94). 따라서 도마복음의 종말론은 우리의 종말이라는 실존적 사태에 관여하며 그것은 개체적 사태, 곧 개체의 죽음을 의미한다(2:322). “종말이란 시간의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의 완성”(2:328)이라는 것이다.
뿐 아니라 도마복음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저자는 예수에 대한 일체의 신앙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깨달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탈로서의 구원을 가르친 예수는 그가 구약의 하나님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니체보다도 더 본질적인 무신론자”(3:325)로 조명된다. 물론 여기서의 무신론은 신의 존재가 인간의 구원과 무관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조율된 개념이다. 이렇듯 도마복음이 보여주는 역사 속의 원형적 예수는 당시 바리새파와 달리 헬레니즘 문명이 번성한 갈릴리의 개방된 풍토에서 자라났으며 레바논 시리아 지역의 개방된 동양적 사유에 큰 영향을 받은 사상가이다(3:329). 그가 가르친 안식은 곧 구원으로서의 자기 해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식할 곳조차 없다고 그가 고백한 것은 “해탈을 거부하는 보살적인 대승 정신”(3:267)의 발로로 풀이되기도 한다. 도마복음의 사상적 정수를 발견하고 예수의 원형적 신학을 조명하면서 저자는 그 특유의 풍부한 동양사상적 지식을 맘껏 활용한다. 그리하여 동양적 풍모를 띤 도마의 예수는 노장과 공자의 사상에 수월하게 접속되고 고독한 초월자의 구원론에 이르러서는 숫타니파타경의 홀로 가는 ‘코뿔소’ 비유에 적절히 상응한다(3:105-106).
반면 도마복음에서 은밀한 말씀을 강조하는 특성은 브데레(Wrede)가 조형한 ‘메시야 비밀’ 이론의 문학적 편집과도 다르고, 밀의종교적인 비의의 속성과도 구별되는 다른 차원에서 ‘난해한 상징성’의 증거로 옹호된다(3:63). 특히, 특권적인 ‘지식’의 소유를 주장한 영지주의의 잡다한 신화론적 우주관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그는 도마복음의 영지주의적 연루 혐의를 제거해버린다. 한편 예수를 선지자와 의사로 인정하면서도(3:56) 그는 예수가 행한 기적을 초자연적인 ‘마술’이 아니라 “상식에 쩔어버린 역사를 변혁시키는 힘”의 상징적 표현으로 자리매김한다(3:58). 이와 같은 독법을 통해 도올의 도마복음 주해가 의도하는 실천적 메시지인즉 오늘날 신화화되고 교조적인 이 땅의 기독교가 해체되고 보다 자유롭고 포용적인 자기 수행의 기독교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인 듯싶다. 마치 “인도불교가 선불교로 변형되었듯이 서구기독교가 동방의 선기독교로 변형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을 “하나의 역사적 필연”(3:383)으로 보려는 시각도 마찬가지의 기대를 대변한다.
III.
이 책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여러 방면에서 제기될 수 있다. 먼저 도올이 자신의 신념에 강하게 함몰한 나머지 도마복음에 대한 전문학계의 논의를 편취하여 그것이 보편적 대세인 양 선전하는 방식에 드러난 왜곡된 과잉 열정과 그로 인한 파행의 흐름을 비판할 수 있다. 특히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서의 본래적 원형이라는 주장이 가장 권위 있는 전문학자들 사이의 대세라는 투의 논조는 사실의 은폐와 왜곡을 조장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그는 “많은 주석가들이 공관복음서의 다양한 자료들을 놓고 도마가 간추려 구성한 것이라는 식으로 억지춘향의 논리를 편다”고 주장하면서 “세계 성서주석학의 수준이 어떤 이념적 편견에 묶이어 있”(3:62)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억지춘향의 논리”와 “이념적 편견”의 실상이 그러한 일방적 재단 이면에 어떤 다양한 지형으로 드러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기성 서구학계에서 다각도로 진행되어온 도마복음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도마복음이 부분적으로 히브리인의 복음서와 이집트인의 복음서 등과 같은 비정경복음서에서 파생된 어록의 수집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부 알렉산드리아 출신 클레멘트의 관련 증언과 도마복음 내의 쌍둥이 어록의 존재가 그 대표적 증거로 거론된다. 둘째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서의 전승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특히 그 어법과 배열 순서를 기준으로 양자를 의존적 관계 또는 독립적 관계로 보려는 관점이 존재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양자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도마복음이 공관복음에 의존한 편집물이라는 입장에서는 그 유사점을 강조하고 독립된 저작이라는 관점에서는 그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셋째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 모두 그 이전의 공통된 자료에 의거하여 나름대로 문학적 창작을 했다는 입장이 있다. 전통적 자료들이 그 과정에서 호출되어 재활용되고 간텍스트적으로 재가공되면서 각기의 편집적 전승의 경로를 밟아갔으리라는 추론이다. 비록 도마복음이 정경복음에 의존하여 작성되었으리라는 주장이 다수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편이지만 이 논점은 아직 미해결의 난제로 남아 있다.
도마복음의 산출 연대의 비정 역시 Q문서와 같은 예수의 어록이 편찬되기 시작한 1세기 중반에서 파피루스 옥시린쿠스의 사본과 히폴리투스에 의한 언급을 증거로 2세기 중반까지 다양하게 산포된다. 영지주의의 산물로 보는 일부 관점에서는 이 자료를 훨씬 후대로 내려 잡아 3세기의 편집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주장들은 텍스트 안팎의 매우 빈약한 증거에 기댄 추론 이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도올의 강변대로 “억지춘향의 논리”나 “이념적 편견”의 산물이 아니라 워낙 부족한 증거를 가지고 최선의 분석과 개연적 추리를 통해 산출한 나름의 학문적 결론인 것이다. 더구나 도마복음이 Q자료와 동시대이거나 더 선행하며 역사적 예수의 본래적 원형을 담아내고 있다는 주장은 도올의 주장대로 학계의 대세가 아니며 그가 대부분 의존하고 있는 크로산을 비롯한 예수 세미나 팀의 일부 주장일 뿐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옹호하는 세력을 추켜세워 “미국 주요 신학자들을 총망라한 지저스 세미나 운동”(3:191)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들은 북미 성서학계의 지극히 적은 일부 신약성서학자들 및 고대기독교문헌학자들(‘신학자들’이 아니라)로 구성된 소수의 학자군일 뿐이다. 그들이 대중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매스컴의 적절한 활용과 꽤 선정적인 언론 플레이에 빚진바 적지 않고, 국내 독자들에게도 주로 이런 쪽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소개된 영향도 크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으로 재조명한 비묵시와 탈종말론의 예수와 현자 예수의 역사적 진정성 운운은 기실 19세기 이래 니체가 암시하였고 예수전 집필 붐과 함께 도래한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상을 재탕하면서 기존의 궤적을 큰 틀에서 선회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들 내부 진영에도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예수를 “캘리포니아 버전”의 예수, 북미중산층 백인 지식인들에 의한, 그들의 취향에 부응한 예수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다. 그들의 예수가 외려 이 시대에 낯선 부분을 도려낸 결과 이념적인 편향에 치우친 억지춘향의 산물이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로 현재 북미에서조차 퇴조하고 있다(예컨대, 현재 북미 성서학계의 대표기관인 SBL 모임에서도 이들이 주도해온 ‘역사적 예수’ 분과 자체가 개설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 도올이 이 책에서 역사적 예수의 사회 참여적 성격과 실존주의적 수행자의 모습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데서 탐지되는 균열을 지적할 수 있겠다. 전자는 공관복음의 예수 상을 부인하지 못하는 데 터한 관점이고, 후자는 도마복음과 Q자료의 견자 예수를 부각시키는 데서 도출되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도마복음의 예수가 추구한 ‘강렬한’ 사회참여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대의 어떤 역사적 맥락을 걸치고 있는지 분명히 밝혀야 했다. 그러나 그가 내놓은 해법은 예수의 행적을 둘러싼 구체적인 역사적 관계망과 그 실천적 내용이 아니라 앙가주망과 탈앙가주망의 역설적 혼재이다. 이를테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관심과 사회적 무관심은 궁극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는 가치”(3:78-9)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파행은 역사적 예수를 ‘역사’ 속에 위치시켜 그 구체적인 육체성을 부각시키면서 도마복음의 선문답적 어록에 비친 탈역사적인 예수로의 증발을 막으려는 고육지책에서 비롯된 듯하다.
뿐 아니라 도올의 논법이 지닌 의도적 파격성과 그 대중적 어필의 의도를 감안하더라도 그의 진술은 과도한 자의식의 도취로 인해 더러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사실의 왜곡과 황당한 허세를 동반하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성취를 얼룩지게 하는 결함이다. 가령,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 운운하는 거창한 장면들은 모두 마가의 드라마 구성에서 연유된 픽션으로 간주”되는 것이 “현재 성서학자들의 대세”(2:100)라거나 “도마복음의 단독자 전통이 기나긴 수행승의 전승을 거쳐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적 단독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2:311)이라는 주장은 직관적 판단을 넘어 과도한 비약일 뿐이다. 나아가 “고린도전서 2:9에서 본문의 인용구가 이사야 64:3의 의미맥락과 다르기 때문에 도마복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로빈슨(M. Robinson)의 단견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2:315)이나 “중동세계의 종말론은 거개가 모두 조로아스터교에 근원하고 있다”(2:327)는 무모한 일반화 등은 동서고전을 섭렵하는 저자의 방대한 탐구 의욕이 섬세한 학문적 검증의 결여라는 패착으로 드러난 사례이다. 이러한 과잉 자의식은 한 술 더 떠 “나 도올을 모독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 도올이 말하는 말씀에 내재하는 성령, 그 진실을 모독할 수는 없다”(3:118)는 식의 치기어린 독백으로 추락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마복음의 예수에 반향하는 결기 어린 선문답이라고 보기엔 너무 비성찰적인 진술이 아닌가 싶다.
나는 도마복음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예수 전승의 또 다른 궤적이 담겨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기독교란 종교를 떠나 인류 문명의 소중한 유산이고 이를 매개로 놓고 볼 때 “헬레니즘 문명권 속의 인도적 사유와 팔레스타인적 사유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3:108) 할 수도 있다고 본다. 비록 콥트어 원문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과 이해가 담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주에 담긴 섭동적 도전 정신도 높게 평가한다. 전반적인 해석학적 틀과 세세한 주석의 내용과 관련하여 나로서는 이견이 깊지만 도마복음의 사상세계에서 “자각적 해탈론”(3:85)과 “선적 회향”(3:86)의 요소를 포착한 점도 사상적 교통 공간의 원활한 소통이란 견지에서 긍정적으로 볼 만한 여지가 있다. 물론 도마복음이나 예수 어록의 요체를 가짜 ‘나’의 모습을 떨치고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구도적 탐구로 보는 기본 패턴은 도올 이전에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으로 소급되고, 근래에는 역시 도마복음을 묵상적으로 풀어놓은 오강남 교수, 역시 도마복음과 Q자료 등의 문헌을 토대로 동양적 예수의 상(像)을 구상해온 김명수 교수의 학문적 시도와도 연계된다. 그러나 도올이 이로써 동서사상의 융합과 소통을 도모하고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을 기획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특히 그의 비판적 지적대로 자폐적이고 배타적인 체제의 논리를 고수하면서 사회적 반성과 검증을 거부하는 한국교계의 인습적 관행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려는 그의 예언자적 결기는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리라 본다. 따라서 기독교를 포함하여 “종교의 본질을 네가티브에서 포지티브로, 저주에서 격려로, 율법에서 사랑으로, 사망의 위협에서 생명의 환희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3:258)다는 저자의 열렬한 계몽적 웅변에도 명분상 무조건 반대하기 궁색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왕성하게 섭렵하고 원용하는 동양사상의 원융적 지혜와 이로써 촉발되는 계몽적 선기 역시 도마복음의 주해뿐 아니라 교조주의적 체계로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성찰적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학문적 방식은 보다 엄격하고 공정하며 포괄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부동의 진리로 확신하고 그 확신이 부단한 동어반복의 체계 속에 되먹임되는 방식으로 그 바깥의 보다 광범위한 사실을 외면하고 그 진실을 가린 채 과잉으로 범람할 때 그것은 숱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화자찬의 설익은 학문으로 표류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IV.
사족으로 나는 이 책의 거친 문장들 틈새로 자리한 매우 정제된 아름다운 사진들에 매우 감동한다. 그것은 저자가 두 발로 그 거친 근동의 대지를 밟으면서 제조해낸 작품들로서 지독한 ‘치통’과 ‘탈장수술’을 무릅쓴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비친다. 비록 책의 해당 내용이나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사진들이 상당수이지만 도올의 이 치열한 탐구 정신의 진취성과 구도자적 모험의 개방성은 그를 싫어하는 기독교인들도 열과 성을 다해 배워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인류 문명의 기원과 역사의 원형을 찾아 온 몸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치열한 예수의 구경적(究竟的) 신학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뱀처럼 지혜로운 견자는 독조차 약으로 바꾸어 쓸 줄을 알지만 어리석은 자는 약까지 독으로 만들어 폐기해버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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